“강릉 진사 김영의 집 배나무 열매가 사발만 했는데 맛이 달고 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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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진사 김영의 집 배나무 열매가 사발만 했는데 맛이 달고 연하다”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⑭ 천사리(天賜梨), 크고 달고 맛있는 강릉의 배

    • 입력 2024.02.24 00:01
    • 수정 2024.03.01 23:23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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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몇 년 전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 들렀다가 경내에서 배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무심히 지나다가 문득 나무의 품종을 써놓은 푯말을 보았는데 바로 천사리였다. 이른 봄이었으므로 꽃이나 열매를 볼 수는 없었지만, 허균을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반가웠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는 여전히 천사리라는 배가 발견된다는 사실도 기뻤다.

    허균의 ‘도문대작’을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읽어본 사람들은 대체로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음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나 음식평이 많을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막상 읽어보면 짤막한 정보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하게 기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사실 ‘도문대작’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반까지 허균이 직접 경험했던 다양한 음식을 몇 가지 종류로 분류해서 적어놓은 책이다. 모든 비평이 개인의 경험과 평가를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음식비평서일 것이고, 음식 재료나 조리 방법을 일부 적어놓은 것이 초점을 맞추면 음식조리서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음식을 매개로 유배객으로서의 허균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 인문서로 읽어낼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허균의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은 ‘도문대작’을 훨씬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다. 근래 북한 이탈주민의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목숨을 건 순간을 겪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장 많이 상상하는 것이 음식이라고 한다. 음식은 인간 생존의 필수 요소인 데다 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허균 역시 어렵고 힘든 유배 생활 속에서 자신이 과거에 즐겼던 음식을 떠올리며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발동한 탓으로 보인다.

     

    ‘도문대작’에서 허균은 천사리를 포함하여 다섯 종류의 배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도문대작’에서 허균은 천사리를 포함하여 다섯 종류의 배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간단한 기록으로만 기술되어 있는 이 책에서 짧으나마 일화가 있는 항목은 강릉 관련 기록이 여러 편이다. 그중에서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천사리(天賜梨)이다. 천사배라고 부르는 것인데, 글자로만 보면 이것은 ‘하늘이 하사해 준 배’라는 뜻이다. 조선 중기 이전 강릉 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설화를 허균이 듣고 기록한 것인데, 그는 실제로 천사리로 불리는 배를 먹어본 경험이 있다. 그러므로 허균 생존 당시 강릉 지역에서는 이런 품종의 배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짧은 기록을 가지고 품종을 정확하게 재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도문대작’에서 허균은 천사리를 포함하여 다섯 종류의 배를 기록하고 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기록이지만, 천사리 항목에는 특별히 짧은 설화가 들어있다. 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하늘 배(天賜梨) :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1465~1487) 우리나라 성종 연간, 연간에 강릉에 사는 진사(進士) 김영(金瑛)의 집에 갑자기 배나무 한 그루가 돋아났는데 열매가 사발만 하였다. 지금까지도 많이 있는데 맛이 달고 연하다.”
    천사리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정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누구도 명확하게 비정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근대 이전 기록 특히 한문으로 된 기록을 통해서 그 식물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품종의 세부적인 명칭을 정확하게 기록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고, 옛사람들은 자신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부르던 것을 한자로 바꾸어서 표기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학문적 엄밀성을 요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천사리에 대한 허균의 기록에서 명확한 사실이 몇 가지 확인된다. 하나는 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사발만큼 커다란 품종이라는 점이다.

     

    강릉에 살던 진사 김영의 집에 배가 한 그루 자라기 시작했는데 그 나무에 사발 만한 크기의 배가 달렸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강릉에 살던 진사 김영의 집에 배가 한 그루 자라기 시작했는데 그 나무에 사발 만한 크기의 배가 달렸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강릉에 살던 진사 김영의 집에 어느 날 갑자기 배가 한 그루 자라기 시작한다. 그 나무에 사발 만한 크기의 배가 달렸는데 달고 연했다는 것이다. 성화(成化)는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로, 1465년부터 1487년 사이를 의미한다. 허균이 살았던 시대보다 백 년도 더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는 이 일화를 강릉에서 지낼 때 들었을 것이다. 달고 연한 배를 먹으면서 배나무의 유래를 들었던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서 기록으로 전하게 되었다.
    천사리는 강릉뿐만 아니라 동해안 지역에서는 제법 널리 알려진 품종이었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1621년 2월에 쓴 글 ‘희증열반산인혜인서(戱贈涅槃山人慧仁序)’(어우집 권4)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있다. 유몽인이 겨울 동안 금강산 표훈사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예전부터 교유가 있던 혜인 스님이 찾아온다. 절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려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혜인 스님은 인간의 모든 삶은 전생의 인연이 있는 것이므로 전생의 빚을 모두 갚아야 끝나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유몽인은 아마도 표훈사에 전생의 묵은 빚이 있는 게 분명하다면서, 자신이 이곳에 머물 때 많은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음식과 시를 나열한다. 거기에 보면 강원도 간성(杆城)에 사는 몇몇 사람은 전어, 전복, 대구 등과 함께 천사리를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또 조선 후기의 문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1722년 전라남도 강진 쪽으로 여행하면서 '남유록(南遊錄)'을 남겼다. 12월 30일 영산강을 건넌 뒤 눈이 내리고 날이 저물어 아는 사람 집에 머문다. 저녁을 먹은 뒤 그 집에서 주는 무를 먹었는데 영산포 인근에서 생산된 것으로 뿌리가 아주 컸다. ‘그 무의 맛이 달고 물이 많아서 천사리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고 썼다. 이하곤 역시 천사리라고 하는 배를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낯선 남쪽 지방에서 맛보는 무의 맛을 비교할 때 거론하였던 것이다.

    배나무 혹은 배꽃은 우리 문화사 속에서 알게 모르게 깊이 들어와 있어서, 뜻밖의 장소에서 배를 만나는 일이 잦다. 비싸고 귀한 과일은 아니었던 탓에 삶에 지친 백성들의 곤고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일도 많았다. 허균이 ‘도문대작’ 안에 천사리를 올려놓은 것은 험난한 시절을 넘은 뒤 포근한 보금자리를 제공했던 강릉의 이미지가 평생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강릉에서 맛보던 천사리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입맛을 쩍쩍 다셔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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