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시, 온양(溫陽)에서 나는 것이 색깔도 붉고 맛도 달고 진액이 매끄럽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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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홍시, 온양(溫陽)에서 나는 것이 색깔도 붉고 맛도 달고 진액이 매끄럽게 흐른다.”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⑯ 가을을 부르는 조홍시의 맛

    • 입력 2024.03.09 00:00
    • 수정 2024.04.03 17:38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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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감이 흔한 동네에서 자란 사람들은 붉은 감이 나무에 달린 모습만 봐도 마음이 훈훈해진다. 평생을 객지에서 살아온 탓에 이제는 고향이 타향처럼 느껴지는 내게도 감이 달려서 익어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고향의 따스함이 온몸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감에 대한 기억이 마음 깊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 주변으로는 감나무가 지천이었다. 봄볕이 비추기 시작하면 감나무의 연녹색 여린 잎이 가지에서 퍼지기 시작한다. 눈 부신 햇살 비치는 투명한 연녹색 잎의 살랑거림은 나에게 봄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지표 역할을 한다. 하굣길에 혹은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우연히 쳐다본 푸른 봄 하늘을 배경으로 감나무의 연녹색 잎이 여린 손을 펴는 걸 보면 괜히 흐뭇해지곤 했다. 감나무가 검푸른 빛으로 무성해지면 여름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뜻이다. 이 무렵이면 옅은 노란빛이 어린 감꽃이 핀다. 한두 송이 따서 먹기도 했는데, 약간 들척지근한 맛이 돌았다. 간식거리가 없는 시골 아이들에게는 그것도 먹을거리였다. 따가운 햇볕 아래 푸른 감이 열리기 시작하면 여름이 한껏 깊어가는 증거였다. 하루가 다르게 감이 커 가면 조만간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이 온다는 뜻이었다. 감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일찍 단풍이 들었다. 푸른색 나뭇잎이 붉은색으로 바뀌어 가면서 나날이 달라지는 빛깔의 향연은 마을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그러다가 잎 사이로 푸른 감이 붉게 변하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감이 열리면 우리는 긴 장대를 가지고 홍시를 따서 먹었다. 너무 익은 것은 저절로 떨어졌기 때문에 나무 밑에 떨어져 깨진 홍시를 주워 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긴 장대를 들고 홍시가 달린 나뭇가지를 꺾어서, 익은 것은 먹고 조금 덜 익은 것은 벽에 걸어두었다가 며칠 지나 익으면 따서 먹었다.

     

    감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일찍 단풍이 들었다. 푸른색 나뭇잎이 붉은색으로 바뀌어 가면서 나날이 달라지는 빛깔의 향연은 마을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감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일찍 단풍이 들었다. 푸른색 나뭇잎이 붉은색으로 바뀌어 가면서 나날이 달라지는 빛깔의 향연은 마을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그렇지만 감은 보관이 쉽지 않았다. 덜 익은 감을 따서 방에 두면 서서히 익어가기 때문에, 완전히 익은 홍시는 따서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다. 조선 후기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감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상수리나무 잎으로 감을 하나씩 두텁게 싸서 싸리나무 광주리나 유기 같은 그릇에 넣은 뒤 그것을 시렁에 얹어놓고 거적으로 두껍게 덮어놓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홍시가 되기 전에 감을 따서 끓인 다음 미지근한 소금물에 담가 두면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후자의 경우는 흔히 ‘침시(沈柹)’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렇게 만드는 것을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는 ‘감을 담근다’고 표현한다. 약간 붉은 감을 침시로 만들어 놓으면 아삭한 감의 식감이 오래도록 살아있을 뿐 아니라 감 특유의 떫은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감을 오랫동안 보관할 방법이기도 했다.

    허균이 살았던 시절에는 감나무의 북방 한계선이 한양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감을 먹어본 경험은 대체로 강릉에서 살았던 시절에 있었거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남쪽으로 갔을 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상당히 많은 지역에서 감을 먹어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도문대작’에서 기록한 조홍시 항목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조홍시. 온양(溫陽)에서 나는 것이 색깔도 붉고 맛도 달고 진액이 매끄럽게 흐른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이에 못 미친다.”

    온양의 조홍시는 조선을 대표하는 품종이었다. 이곳은 허균이 고을살이를 하거나 여러 공무로 자주 오가던 곳이었기 때문에 조홍시를 맛볼 기회가 많았다. 요즘은 조홍시라는 품종을 전남 담양에서 발견된 우연실생으로 규정하지만, 조선 시대 기록에서의 조홍시는 다른 감보다 빨리 익는 품종으로 매우 붉은 빛을 띠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옛날과 지금의 조홍시가 같은 품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 온양의 조홍시가 전국적으로 이름 높은 품종이었던 점은 분명하다. ‘각사등록(各司謄錄)’에 수록된 충청감영의 장계(狀啓)중에서 고종 12년에 올린 내용을 보면 궁중에서 각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온양군 도회소(都會所)에서는 조홍시를 올리도록 했다는 점을 기록해 놓았다. 허균은 바로 이 품종의 조홍시를 맛보면서, 전국 어디에서 먹던 조홍시보다 맛있었다고 했다.

     

    허균이 말한 조홍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색깔이 매우 붉다는 점, 맛이 달다는 점, 진액이 매끄럽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이 말한 조홍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색깔이 매우 붉다는 점, 맛이 달다는 점, 진액이 매끄럽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이 말한 조홍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색깔이 매우 붉다는 점, 맛이 달다는 점, 진액이 매끄럽다는 점이 그것이다. 홍시 중에는 과육이 쫀득쫀득한 것도 있고 약간 퍽퍽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있지만, 잘 익은 홍시를 먹는 즐거움은 빨갛게 익은 열매를 반으로 쪼갠 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 흐르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과육의 향연을 들 수 있겠다. 진액이 매끄럽게 흐른다는 표현은 홍시가 잘 익어서 과육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씹을 틈도 없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는 의미다. 입으로 한 번 쭉 빨아들이면 순식간에 껍질만 남는 부드럽고 단디단 홍시가 바로 허균이 생각하는 조홍시의 맛이었다.

    감이 완전히 익어서 홍시가 되기 전이면 곶감 만들 준비를 한다. 붉어지기 시작한 단단한 감을 따서 물에 씻은 뒤 약간 말랑해질 정도로 익힌다. 그리고는 감의 껍질을 깎은 뒤 그것을 싸리나무 가지에 꽂는다. 가지 하나에 열 개씩 꽂아서 처마 밑에 매달아 놓는다. 멀리서 보면 붉은 감으로 만든 커튼처럼 보인다. 집마다 곶감을 만들기 때문에 가을이면 뒷동산에서 바라보는 마을이 온통 붉은 천으로 집을 장식해 놓은 듯하다. 이렇게 만든 곶감은 장에 내다 팔아서 가용에 보태 쓰기도 하고 잘 저장해 놓았다가 명절이나 겨울철에 귀한 먹을거리로 내놓는다.

    어릴 때 입맛은 나이가 들어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허균이 방풍죽 항목에서 쓴 것처럼, 어려운 시절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도 나중에 형편이 좋아진 뒤에 먹어보면 뜻밖에 맛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감떡도 마찬가지다. 어쩌다가 강원도 시골 장터를 다니다가 드물게 감말랭이나 감떡을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사서 먹어보면 어릴 적 달고 쫀득한 감떡의 맛과 식감이라든지 감말랭이 특유의 단맛은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저 추억을 떠올리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억들이 내 인생을 구성해왔고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허균의 ‘도문대작’은 음식으로 구성하는 자신의 인생역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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