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⑪충주와 원주의 수박이 최고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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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⑪충주와 원주의 수박이 최고였지

    • 입력 2024.02.03 00:03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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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수박을 볼 때마다 나는 이 과일이 한반도에 처음 재배될 때가 언제일지 궁금하다. 옛날 사람들도 수박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궁금해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허균 역시 ‘도문대작’에서 수박을 맛있는 과일로 기록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수박[西瓜]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 개성(開城)에다 심었다. 연대를 따져보면 아마 홍호(洪皓)가 강남(江南)에서 들여온 것보다 먼저일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상품(上品)인데 모양이 동과(冬瓜)처럼 생긴 것이 좋으며, 원주(原州) 수박이 그다음으로 좋다.”

    허균의 기록에 등장하는 홍다구(洪茶丘, 1244~1291)는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준비했던 홍준기(洪俊奇)의 어린 시절 이름이다. 그의 조부가 고려 고종 때 몽골에서 고려로 투항한 이래 고려 사람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홍다구는 원나라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지냈지만,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아 고려에서 관직을 받는 바람에 고려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수박을 들여온 사람으로 홍다구라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목했을 때에는 허균의 박람강기(博覽强記)한 특성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기록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도문대작’에서의 기록은 너무 짧아서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권32)에 의하면 원나라 세조(世祖) 때에 어떤 사람이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하는 기록을 남겼다. 원나라 세조는 1259년부터 1294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니, 연대로 보면 허균의 기록과 같은 시기다.

     

    조선 후기에는 한반도 전역에서 수박이 재배되어 널리 알려진 과일이 되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조선 후기에는 한반도 전역에서 수박이 재배되어 널리 알려진 과일이 되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조선 후기에는 한반도 전역에서 수박이 재배되어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과일이 되었다. 이 과일이 처음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대체로 고려 시대라고 하면 아무래도 개경이나 평양 인근에서 재배가 되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임하필기’에서도 수박이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진 과일이라고 하면서, 조선에서는 경기도의 석산(石山), 광주광역시의 무등산, 평안도의 능라도(綾羅島) 수박의 품질이 가장 좋다고 평가하였다. 경기도 석산은 정확히 어느 지역을 지칭하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경기도 양평이나 이천 지역으로 추정된다. 무등산의 수박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수박 재배지가 지금도 여전히 전승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북으로 분단된 지금은 평양 능라도의 수박을 맛볼 수는 없지만, 조선 시대 기록 여러 곳에 등장한다. 조선 후기 문인 한필교(韓弼敎, 1807~1878)의 ‘수사록(隨槎錄)’(권2)에서도 능라도의 수박이 맛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허균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지역의 수박을 맛보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맛있었던 수박으로 충주와 원주를 언급한다. 조선 후기가 되면 왕실뿐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있는 양반가에서는 제사나 천신(薦新)을 할 때 제사상에 수박을 올린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지만 조선 전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수박이 토산품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박은 고려 시대 들어와서 재배되었지만,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귀한 과일이었을 것이다.

    허균 역시 부친의 관직 이력이라든지 그 자신의 경험 때문에 여러 곳에서 수박을 먹었을 뿐 일반적으로 널리 맛볼 수 있는 과일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도문대작’의 고기 종류와 수산물 종류를 써놓은 부분에서 허균은 민간에서 널리 요리되는 것들은 특별히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보면 ‘도문대작’에 기록되어 있는 항목 중에 많은 부분은 민간에서 쉽게 구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박 역시 그런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허균과 같이 지체가 높은 집안에서 맛볼 수 있는 과일이었다.

     

    규모가 있는 양반가에서는 제사나 천신(薦新)을 할 때 제사상에 수박을 올린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규모가 있는 양반가에서는 제사나 천신(薦新)을 할 때 제사상에 수박을 올린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조선 후기가 되면 수박을 재배하는 방법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언영(李彦英, 1568~1639)은 글 읽는 방 뒤쪽 공터에 수박 수십 포기를 심는다.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지만 어떤 것은 무성하게 잘 자라고 어떤 것은 말라 죽는 것을 보면서 학문의 도리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의 ‘종서과설(種西瓜說)’(완정집(浣亭集) 권4)을 남겼다. 아무리 바탕이 좋아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현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를 거기서 찾는다. 수박을 심어서 기르는 것이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이 시기부터 수박을 재배하는 글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언영의 다음 세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홍만(洪萬選, 1643~1715)이 저술한 산림경제(山林經濟)라든지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등 주요 기록에는 빠짐없이 수박을 재배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부터 조선에서의 수박 재배가 널리 퍼졌고, 19세기 말이 되면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조선 전역에서 수박은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과일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 허균이 살았던 17세기 전기만 하더라도 수박은 구하기 쉽지 않았다. 허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던 인물이다. 모친이 병에 걸려 위독했을 때 너무도 수박을 드시고 싶어 하셨다. 때는 음력 5월 초순이어서 수박이 아직 열리기 전이었다. 그는 병든 어머니를 위해서 백방으로 수박을 구했지만 결국 어머니는 수박 맛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이 일 때문에 조극선은 수박을 볼 때마다 모친에 대한 애통함과 그리움을 일으켰고, 평생토록 수박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의 윤창세(尹昌世, 1571~1639) 역시 모친의 병이 깊었을 때 수박을 먹고 싶어 했지만 구해 드리지 못했던 일 때문에 평생 수박을 먹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제는 전국에서 수박이 생산되지만, 허균이 맛있게 기억하고 있는 수박 생산지인 충주와 원주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당도가 높고 품질이 우수한 수박이 생산되고 있다. 먹을 것이 흔해졌다고는 하지만 과일마다 깃든 추억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우리가 매일 겪는 작고 흔한 기억들이 모여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나’라고 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만드는 법이다. 수박에 깃든 작은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하나의 조각이었다. 잊고 살았지만, 수박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억의 조각이 내 마음 깊은 심연에서 관성으로 굳어가는 내 삶을 일렁이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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