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⑧찻자리의 귀한 벗 다식(茶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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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⑧찻자리의 귀한 벗 다식(茶食)

    • 입력 2024.01.13 00:01
    • 수정 2024.01.16 00:11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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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봄이면 할머니를 따라 송화를 따러 다니곤 했다. 노랗게 물든 소나무꽃을 할머니가 꺾느라 골몰하고 계실 때 사실 우리는 이리저리 산을 싸돌아다니면서 기웃거리는 것에 전부였다. 인적이 없는 봄날의 산은 참으로 고요했지만, 봄꽃을 한껏 피웠다가 떨군 뒤라 제법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빛이 역력했다. 봄 하늘 저쪽으로 바람이 몰려가면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건너편 산자락 자작나무들은 일제히 잎을 뒤집으며 흰빛을 반짝였다. 산 중턱에서 바라보면 바람이 불 때마다 송홧가루의 노란 물결이 바람 따라 일렁이는 모습도 신비스러웠지만, 자작나무 숲이 온몸을 뒤집어 흰빛으로 응답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하게 떠오르는 그 광경은 늦봄을 느끼게 하는 나만의 촉매제였다.

    할머니는 며칠을 그렇게 산으로 다니면서 송화를 꺾어 와서 송홧가루를 얻었다. 사실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만드는지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의 어린아이처럼 나는 할머니와 산을 쏘다니는 것이 즐거웠을 뿐 할머니가 여러 단계의 노동을 거쳐서 송홧가루를 얻는다는 점은 몰랐다. 지금이야 송홧가루를 가지고 술이나 강정, 다식 등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당시 우리 동네처럼 가난한 시골에서는 다식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다식(茶食)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귀한 먹을거리였다. 이것은 다른 음식과 달리 배부름을 위해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간식거리로 소용되었다. 송홧가루는 봄에 소나무 꽃이 노랗게 필 때면 꽃대를 꺾어서 말리는 과정에서 얻는 꽃가루다. 그 과정이 어려워서 어떤 경우는 꽃대를 물에 담가서 가루를 추출한 뒤 물밑에 가라앉은 꽃가루를 말려서 송홧가루를 얻기도 한다. 그냥 얻은 가루와 물을 이용해서 얻은 가루는 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편의성이라든지 많은 양을 얻기 위해서는 물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렇게 얻은 송홧가루를 꿀에 타서 따끈하게 마시면 향긋한 송화차(松花茶)가 되고, 이것을 꿀에 개서 다식판에 올려서 꾹 눌러내면 송화다식이 된다. 우리 집 뒤꼍 처마 밑에 걸려있던 다식판으로 해마다 약간의 송화다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송홧가루를 꿀에 개서 다식판에 올려서 꾹 눌러내면 송화다식이 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송홧가루를 꿀에 개서 다식판에 올려서 꾹 눌러내면 송화다식이 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의 기억에도 다식은 맛있는 간식이었을 것이다. 도문대작에는 두 종류의 다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냥 다식이라고 표기한 것과 율다식(栗茶食) 즉 밤다식이라고 표기한 것이 그것이다. 두 종류는 앞뒤로 나란히 기재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식과 율다식은 재료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율다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을 찌거나 얇게 잘라서 말린 다음 곱게 가루로 만든 다음 체에 쳐서 고운 가루를 만든다. 그것을 꿀과 섞어서 다식을 만들면 율다식이 된다. 율다식은 황률다식(黃栗茶食) 혹은 밤다식이라고도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밀양과 상주 두 곳 모두의 특산물로 밤이 올라있었으니, 조선 전기에는 밤으로 유명했던 곳은 분명하다. 좋은 밤과 꿀이 생산되는 지역이 율다식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될 터인데, 허균이 먹어본 율다식 중에서는 밀양과 상주에서 만든 것이 기억에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

    내가 살던 강릉 인근 시골에서는 1970년대 어름까지 송홧가루로 만드는 다식이 주류는 이루었으므로 다식은 늘 송화다식을 의미하곤 했다. 조선 후기 기록에서도 송화다식은 늘 등장하는 걸 보면 일반적으로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홍금이 박사의 다식 연구에 의하면 17세기 왕실 기록에는 백다식(白茶食)이 진설되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백다식이란 밀가루를 이용하여 만들어서 희게 보이는 것이다. 지금이야 밀가루가 흔하지만, 당시에는 귀한 식재료였다.

    예전에는 다식(茶食)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귀한 먹을거리였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예전에는 다식(茶食)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귀한 먹을거리였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그러나 근대 이전의 자료를 찾아보면 다식을 만드는 재료는 놀라울 정도로 많았으므로 허균이 ‘다식’이라는 조항을 만들고 안동 사람들이 잘 만들었다는 기록을 남긴 것은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편찬된 전순의(全循義, 생몰연대 미상)의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안동다식법(安東茶食法)이라는 조항에 밀가루를 이용한 다식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허균의 다식 조항은 백다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는 주로 궁실이나 관청에서 다식을 사용한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왕실 의례에서는 반드시 들어가는 품목이었고, 일반 관청에서도 공식적인 연회가 열릴 때는 늘 포함되는 음식이었다. 일반 사가(私家)에서도 행사를 치를 때는 다식을 썼겠지만, 평소에 흔히 먹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만드는 방식은 몹시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사는 데 바빴던 가난한 백성들 처지에서는 재료를 마련하는 것 자체가 큰일이었다. 그래서 다식을 만드는 일이 있으면 가까운 분들에게 선물로 보내는 예도 있었다.

     

    송홧가루를 꿀에 개서 다식판에 올려서 꾹 눌러내면 송화다식이 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송홧가루를 꿀에 개서 다식판에 올려서 꾹 눌러내면 송화다식이 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퇴계와 율곡이 활동하던 16세기는 조선 성리학의 황금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당시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과 평생의 벗으로 지냈다. 성혼이 1576년 10월에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서로의 안부와 학문을 묻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편지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답장인데, 송익필이 편지를 먼저 보낼 때 송화다식과 송홧가루를 함께 보낸 일이 언급되어 있다. 그는 송홧가루를 모으기가 어렵고 오래 걸린다고 하는 ‘본초’(本草)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이것을 약으로 먹을 예정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성혼은 송익필에게 토사자(免絲子) 3되를 보냈다. 이렇게 다식은 일반 사가에서 귀중한 선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다식에 관한 기록을 살피다 보면 고려시대부터 이미 한반도 지역에서는 널리 즐기던 음식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 지역에서는 다식이 좋은 자리에 내던 음식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그만큼 다식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우리 민족의 음식사에서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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