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 낚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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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어 낚시의 추억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⑫

    • 입력 2024.02.13 00:02
    • 수정 2024.02.19 00:16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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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한문을 번역하다 보면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옛날과 지금이 단어는 같은데 뜻은 달라진 경우다. 우리가 말하는 은어(銀魚)와 은구어(銀口魚)의 관계가 그러하다. 한문에서 은어는 지금의 도루묵에 해당하고, 지금의 은어는 한문에서 은구어라고 쓴다. 허균의 ‘도문대작’에 보면 두 가지 사례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그 차이를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글을 쓰다 보면 두 단어는 늘 헷갈린다. 이 글에서는 ‘은구어’를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은어’로 쓰도록 하겠다. 말하자면 허균이 쓴 ‘은구어’는 이 글에서 모두 은어라고 표기하였다. 독자 여러분의 착오 없으시기를 바란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즈음이면 우리는 낚싯대를 하나씩 어깨에 둘러메고 동네 앞 강가로 간다. 바야흐로 은어 낚시의 계절이 왔기 때문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서 낚싯대라고 해봐야 변변한 게 있을 리 만무다. 집 뒤란에 자라는 대숲에 들어가 적당한 놈을 골라 낫으로 자른 뒤 가지만을 툭툭 쳐내면 낚싯대가 된다. 대나무 가지는 워낙 날카롭게 때문에 다치지 않도록 부드럽게 정리를 한 뒤, 그 끝에다 낚싯줄을 매단다.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았다. 낚시에 깃털 달린 찌를 묶어서 그냥 사용한다. 말하자면 가짜 미끼(‘루어 lure’라고도 부른다)를 달아서 은어 낚시를 했던 것이다.

    은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여름날이 저물어 갈 무렵 강둑을 걷다 보면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오후를 스쳐 간 소나기 때문에 약간은 습한 기운이 공기 중에 머물고 있고, 산 너머에서 스며오는 붉은 햇살이 잔잔한 물에 비치면 무언가 아득한 느낌이 들면서 슬픔 같은 것이 밀려오곤 했다. 열댓 살 때쯤 되는 아이가 인생에 대해 무얼 알겠는가마는 이런 때 강둑에 서서 그 순간을 즐기곤 했던 기억이 있다. 인적 없는 강둑에서 고요한 분위기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나를 깨워준 것은 바로 은어였다. 저녁이 되면 고요한 강 수면으로 수많은 것들이 튀어 오르는데, 단연코 은어가 대부분이었다. 물 위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이상한 상념에서 깨어나곤 했다. 훗날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만났던 시경(詩經) 구절, “솔개는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오른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대목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강둑에서 보았던 은어 튀어 오르던 풍경이 떠올랐었다.

     

    은어. 사진=국립생물자원관
    은어. 사진=국립생물자원관

     

    은어를 낚기는 했어도 그것을 먹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재미와 낚시질을 한다는 즐거움 때문에 그렇게 돌아다닌 것이지 은어를 잡아서 먹겠다는 의지는 별로 없었다. 은어를 꿰어서 집으로 가노라면 늘 어른들이 과자 한두 봉지를 사주시면서 은어를 가져가셨기 때문에, 특히 나에게 은어를 먹었던 기억은 없다. 오히려 은어를 먹으면서 감탄했던 것은 나이가 들어 경남 밀양에 갔을 때 우연히 어떤 식당에서 은어 정식을 발견했을 때였다. 은어를 다양하게 요리해서 코스요리처럼 내오는 것이었는데, 은어의 맛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신기하게 여겼던 적이 있었다.

    허균은 은어를 어떻게 먹었을까. 사실 허균의 문집에서 은어의 조리법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수는 없다. ‘도문대작’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은어[銀口魚] : 영남에서 나는 것은 크고 강원도에서 나는 것은 작다. 해주에도 있다.”

    은어는 회부터 구이와 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리방식으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과 향이 있는 듯하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은어는 회부터 구이와 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리방식으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과 향이 있는 듯하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의 기록을 보니 예전 밀양에서 먹었던 은어의 크기가 떠올랐다. 고향 마을에서 잡던 은어보다 더 커서 마음으로 놀랐던 기억이 있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강원도 시절의 음식을 여러 종 기록하였는데, 이는 어려운 시절을 무사히 지내면서 이전의 비극적 기억을 치유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한양에 살던 그는 임진왜란을 맞아 갑작스럽게 피난을 가게 되었다. 외가가 있던 강릉으로 길을 잡아 떠났다.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가 세상을 떠나고 노모만 살아남아 강릉으로 왔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애끊는 듯했으랴.

    강릉 사천에 있는 애일당(愛日堂)에서 지내며 독서와 산책, 시 짓기, 지역의 명사들과 교유 등을 통해서 마음속 깊은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을 한다. 물론 그 아픔이 한꺼번에 사라지지는 않았으리라. 허균의 글에서도 언뜻언뜻 그 경험을 반영하는 부분이 보이는 걸 보면 비극적 사건은 가슴에 깊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강릉에서 1년 넘게 피난살이를 하는 동안 몸과 마음을 추스른 허균은 드디어 과거 시험에 응시할 마음을 먹게 된다. 강릉 인근 지역의 음식 경험은 바로 이 시절의 것이리라. 아프고 어려웠던 시절 먹었던 음식이니 얼마나 마음에 각인이 되어 있었겠는가. 강릉의 은어는 그 시절의 기억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황해도 은어는 그가 황해도사(黃海都事)로 근무했던 시절과 공무로 북방 지역을 오갈 때 수시로 경험했을 것이다. 자주 먹었던 음식이기도 하고 대체로 순탄하게 살아가던 시절이었으므로 생각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영남 지역의 은어를 중요하게 기록한 것은 아무래도 허균에게는 최고의 맛이었기 때문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지’ 등의 문헌을 뒤져보면 은어는 전국 어디서나 잘 잡혀서 그 지역의 토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은어가 잡힐 철이면 전국 어디를 가든 맛볼 수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허균이 영남 지역과 강릉, 황해도를 특별히 거론한 것은 그의 음식 경험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겠다.

    요즘은 은어도 계절에 따라 수급량의 차이는 있지만 구하지 못할 물고기는 아니다. 게다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기 때문에 은어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다면 일부러 구해서 먹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렇지만 회부터 구이와 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되어 여전히 소비되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은어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과 향이 있는 듯하다. 환경의 변화와 함께 전국에서 발견되던 은어는 보기 힘들어졌고, 그와 함께 내 어린 시절의 추억도 희미해졌다.

    여름 저녁 바람에 실려 오던 희미한 물비린내와 함께 석양빛 속에서 튀어 오르던 은어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언제나 호젓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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