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⑨죽실(竹實)로 마련하는 든든한 한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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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⑨죽실(竹實)로 마련하는 든든한 한 끼

    • 입력 2024.01.20 00:01
    • 수정 2024.01.26 00:22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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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어릴 적 살던 집 뒤란은 울창한 대숲이었다. 지금은 대나무의 북방 한계선이 많이 올라왔지만,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강원도에서 대나무가 자생하는 곳은 영동 지역이었다. 뒤꼍으로 향한 문을 열면 늘 습기가 밀려왔고,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그곳에는 대숲이 울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대숲은 우리 집 뒤꼍에서 시작해서 그 뒤로 이어지는 야산으로 퍼져있었다. 어쩌다 대숲으로 들어가면 높이 자란 대나무의 일렁이는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지곤 했다.

    중학교에 막 들어갔던 해, 집 뒤 대나무들이 누렇게 말라죽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보질 못했던 풍경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 어른들은 이 현상을 보고 대나무가 죽어간다고 했다. 대나무는 대충 60년 정도를 사는데, 마지막으로 꽃을 피운 뒤 누렇게 말라 죽는다고 했다. 실제로 대나무는 종류에 따라 60년에서 120년 사이를 사는데, 꽃을 피우면 말라 죽는다는 것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어떻든 그해 집 뒤 대숲의 대나무 중 삼 분의 일 정도가 죽었는데, 거기에 피우던 꽃이라든지 열매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숲은 집 뒤꼍에서 시작, 야산으로 퍼져있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대숲은 집 뒤꼍에서 시작, 야산으로 퍼져있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대나무가 꽃을 피운 뒤 맺힌 열매가 죽실(竹實)이다. 사실 동아시아 문화에서 대나무는 봉황과 관련하여 다양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봉황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날아오르며, 오동나무 가지가 아니면 깃들지 아니하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하는 이미지가 있다.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를 해설한 전문(箋文)에서 보이는 구절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된다. “봉황의 성질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鳳凰之性, 非梧桐不棲, 非竹實不食.)고 하였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나무의 문화적 상징 의미라 하겠다. 이런 점 때문에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것은 해당 지역이야말로 봉황이 살아가는 신비스럽고 태평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죽실을 먹는다는 사실을 나는 허균의 글에서 처음 보았다. 아무리 대숲에 둘러싸인 집에서 자랐어도 꽃이 피는 걸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이고 보면 그 열매를 보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대나무 꽃이 피면서 대나무가 누렇게 말라가는 형편이니, 꽃이 지고 난 뒤에 달리는 열매에 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허균은 죽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죽실(竹實) : 지리산에서 많이 난다. 내가 낭주(浪州)에 있을 때 선수(善修) 노스님(老師)이 제자들을 시켜 보내 왔는데, 감과 밤의 가루와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몇 숟갈을 먹었는데 종일 든든했다. 참으로 신선들이 먹는 음식이다.”

    연실(練實)이라고도 부르는 죽실은 일상생활 속에서 상용하는 음식은 아니다. 기근이 심하게 들었을 때 동학농민군들이 죽실을 발견해서 먹는 바람에 아사(餓死)를 면했다는 전설이 전하기는 하지만, 죽실은 일상적으로 만나기는 어려운 열매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경종 3년(1723) 4월, 제주도 한라산에 숲을 이루었던 분죽(紛竹, 솜대)이 갑자기 열매를 맺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던 참이었는데, 죽실을 따서 진하게 죽을 쑤어 먹는 바람에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보면 동학농민군 전설이 허망한 이야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나무가 꽃을 피운 뒤 맺힌 열매가 죽실(竹實)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대나무가 꽃을 피운 뒤 맺힌 열매가 죽실(竹實)이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 역시 죽실을 먹어본 것은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을 지칭하는 낭주(浪州)에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1608년 무렵 부안 현감이었던 심광세(沈光世, 1577~1624)의 도움으로 부안 우반곡(愚磻谷)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공주 목사로 근무하던 중 서얼들을 돕느라고 국고를 헐어서 썼다는 죄로 파직된 상태였다. 부안 우반곡을 은거지로 생각하고 한동안 지내던 그에게, 당시 지리산에 머물면서 수행하고 있던 고승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가 허균에게 죽실 가루를 보내온 것이다.

    부휴선수와 허균의 교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부휴선수는 서산대사로 널리 알려진 휴정(休靜, 1520~1604)과 동문 사형제 사이였으므로 서산 휴정의 제자였던 사명유정(泗溟惟政)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허균이 원래 부휴선수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부안에 있기 전부터 둘째 형 허봉(許篈, 1551~1588) 덕분에 서산대사 및 사명대사와의 교유가 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부휴선수와도 교유할 수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지리산에 머물던 선수가 죽실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부휴선수가 허균에게 보낸 죽실은 온전히 죽실로만 가루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감과 밤 가루를 섞은 것이었다. 최근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옛날에는 죽실에 밤 가루와 곶감 가루를 섞어서 밥을 지어 먹는 죽실반(竹實飯)이 있었다. 재료의 구성으로 보아 허균이 받은 것은 죽실반을 지어서 먹는 재료였다. 그러나 허균은 그것을 가루로 몇 숟가락을 먹었고, 그것만으로도 종일 배가 든든했다고 말한다. 국어사전에 올라있는 죽실반은 대나무 열매인 죽실의 껍질을 까서 멥쌀과 섞어서 지은 밥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죽실이 수수와 비슷한 맛을 낸다고는 하지만 멥쌀과 섞든 밤 가루나 곶감 가루와 섞든 다른 식재료와 함께 조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죽을 쑤어서 먹은 기록도 간간이 보이지만 이것은 굶주림 때문에 죽음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주로 보이는 것이어서 사정이 조금 다르다.

    부휴선수가 허균에게 죽실을 보낸 뜻은 무엇이었을까. 벼슬에서 쫓겨난 뒤 부안에서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 마음이 얼마나 황폐했을지 짐작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밤과 감을 섞은 죽실을 보내서 위로하려 하지 않았을까. 그 죽실을 먹는 허균 역시 신선의 음식을 먹는다는 인식과 함께 자신의 삶을 속세와 한 발짝 떨어지게 만듦으로써 힘들었던 현실에서의 고뇌를 추슬렀을 것이다.

    특히 부휴선수는 임진왜란 와중에도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바람에 서산 휴정과 사명 유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수행자였다. 그러니 허균의 처지가 어렵게 보이지만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떨어져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라는 의미로 죽실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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