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⓶방풍죽 : 허균의 마음을 치유한 소울 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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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⓶방풍죽 : 허균의 마음을 치유한 소울 푸드

    • 입력 2023.12.01 00:01
    • 수정 2023.12.05 08:40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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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한겨울 칼바람 부는 귀양지에서 괴롭게 살아가던 허균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몇 가지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도문대작’을 쓴 일이다. 기한(飢寒)에 허덕이는 현실이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발동해서 전국 각지의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가 서문에서도 말한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보았던 허균이었기에 이런 책을 쓰는 것이 가능했다. 먹을 것 없는 현실에서 수많은 음식을 떠올려 보며 그 맛을 생각하고 품평하는 일이야말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허균이 가장 먼저 떠올린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에 수록된 순서가 꼭 중요도를 가지고 배열한 것은 아니라 해도, 책의 첫머리에 올린 음식이 범상한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음식은 바로 ‘방풍죽(防風粥)’이었다. 허균이 처음으로 방풍죽에 대한 기억을 가지게 된 것은 1592년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균은 가족을 데리고 강릉 외가로 피난한다. 한양에서 출발해서 철원을 지나 마천령을 넘어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 길에는 노모와 만삭의 아내가 함께했다. 마천령을 넘었을 때 아내는 해산했다. 그러나 며칠 뒤 험한 피난길과 해산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는 세상을 떠난다. 엄마의 젖을 먹지 못하게 된 갓난아이 역시 며칠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허균의 마음이 정상적이었을 리 없다. 그 가슴 아픈 사연은 훗날 허균이 제법 높은 벼슬에 올랐을 때 아내를 그리워하는 글에 잘 남아있거니와, 이런 역경과 비극을 거치면서 강릉에 당도했을 무렵 허균의 심신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텅 빈 가슴을 달래기 위해 허균은 강릉 주변을 돌아다녔다. 외갓집이 있던 강릉 사천의 앞바다는 큰 위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호 ‘교산(蛟山)’은 사천 앞바다에 있는 바위인 교문암(蛟門巖)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것을 평생토록 자신의 호로 애용한 것을 보면 허균이 사천 앞바다를 보며 얼마나 위안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시절 만난 음식이 바로 ‘방풍죽’이다.

    허균은 ‘도문대작’의 첫머리에 방풍죽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의 외가는 강릉인데 그곳에는 방풍이 많이 난다. 2월이면 강릉 사람들은 이슬을 맞으며 새벽같이 나가 막 돋아난 방풍 싹을 따서 햇볕에 노출되지 않도록 한다. 곱게 찧은 쌀로 죽을 끓이는데, 반쯤 익었을 때 방풍 싹을 넣는다. 다 끓기를 기다려서 차가운 사기그릇에 옮겨 담아서 반쯤 식으면 그것을 먹는다. 달콤한 향기가 입에 가득하여 사흘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다.”

     

    방풍죽. 사진=강릉시청
    방풍죽. 사진=강릉시청

    허균이 기록한 방풍죽 끓이는 방법은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권2)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그 정도로 이 죽은 방풍을 얻을 수만 있으면 어디서나 쉽게 끓여 먹을 수 있었다.
    방풍은 동해안뿐 아니라 우리나라 해안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풀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길가에서 흔히 자라는 이 풀은 중풍이나 통풍을 치료하는 약재로 이용된다. ‘산림경제’에는 ‘증류본초(證類本草)’를 인용해서 방풍을 약재의 하나로 소개했다. 2월과 10월에 방풍 뿌리를 캐서 볕에 말린 뒤 줄기와 뿌리가 맞닿는 차두(叉頭) 부분, 뿌리 부분이 서로 엇갈려 겹쳐진 차미(叉尾)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차두 부분은 사람을 미치게 하고 차미 부분은 고질을 발생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방풍은 약재로서나 음식으로서나 이 땅의 백성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으며 애용되었다.

    허균이 방풍죽을 다시 떠올린 것은 1604년 9월 4일, 황해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발령이 난 뒤였다. 문득 그는 방풍죽이 먹고 싶어서 즉시 죽을 끓어오라고 했지만, 죽 맛은 12년 전 강릉에서 먹었던 그 맛이 아니었다. 그것이 토산의 차이인지 아니면 조리법의 차이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강릉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20대 초반의 허균이 한 그릇 방풍죽으로 텅 빈 가슴을 치유하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그의 처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방풍죽의 조리법을 앞서 보인 것처럼 소개한 뒤,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였다. “나는 훗날 요산군에 있을 때 시험 삼아 방풍죽을 만들어 보았으나, 강릉 시절 먹었던 죽과는 너무도 차이가 나서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

    방풍의 향긋함이야 강릉이나 요산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강릉 시절과 차이가 있다면 요산의 방풍죽에는 허균의 젊은 시절의 기억이 스며있지 않았다. 사실 방풍은 제대로 된 음식 대접을 받는 식물이 아니었다. 다만 살림이 어려운 민초들에게는 그거라도 뜯어서 먹어야 했다. 허균의 피난 생활이 어찌 넉넉했겠는가. 그가 피난을 위해 강릉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 ‘애일당기(愛日堂記)’를 보면 거의 폐허처럼 변해버린 집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일족들이 도와주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가난한 시절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갓난아기를 잃고 겨우 강릉으로 피난을 온 허균의 마음은 참으로 허전했을 것이고, 먹을 것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연히 맛본 방풍죽의 풍미는 그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방풍의 향긋함이 사흘이나 입안에 맴돈다는 그의 기록은 일생 마음에 깊이 남아있었던 오랜 기억에 상응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주변 상황이 변하면 같은 음식이라도 다른 맛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쩌면 허균도 처지가 달라진 것 때문에 방풍죽의 맛을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문대작’을 쓰고 있는 1611년 무렵은 그의 표현처럼 “쌀겨마저도 부족하여 밥상에 오르는 것은 상한 생선이나 감자·들미나리 등이었고 그것도 끼니마다 먹지 못하여 굶주린 배로 밤을 지새울 때”가 아니던가. 삶의 밑바닥으로 전락한 처지가 되자 그의 마음속 허기를 달래기 위해 떠올린 음식은 다름 아닌 방풍죽이었다. 그에게 방풍죽은 영혼을 달래는 일종의 소울 푸드(soul food)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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