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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풍경] 눈칫밥의 서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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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풍경] 눈칫밥의 서러움
  •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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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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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김삿갓의 시 가운데 ‘이십수하(스무나무 아래에서)’라는 것이 있다. 김삿갓이 어느 부잣집에서 쉰밥을 얻어먹고 나그네의 서러움에 대해서 쓴 시다. 스무나무는 느릅나무과의 시무나무를 말하는데 전편을 옮기면 이렇다.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시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가)
四十家中五十食(사십가중오십식: 망한 놈의 집에서 쉰밥을 먹었네)
人間豈有七十事(인간개유칠십사: 사람 칠십 평생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설은 밥을 먹으리)

김삿갓만이 아니다. 대원군도 얻어먹는 밥과 술로 상갓집 개라는 소리를 들었고, 중국 당나라 때 왕파라는 정승 또한 그랬다. 후일 출세하여 정승이 된 거지 처음부터 정승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아직 세상에 알려지기 전 어느 절의 식객으로 머물 때의 일이다. 

시계도 없던 시절, 절에서는 밥 먹는 시간을 어떻게 알릴까. 지금도 공양간 앞에 작은 종을 매달아놓고 식사 때면 종을 쳐서 밥때를 알리는 절이 있다. 그런 식으로 왕파가 식객으로 머물던 절도 식사 시간이 되면 종을 쳤다. 중들은 자기들 절에 밥을 얻어먹는 왕파를 미워해 저희끼리 속닥속닥 연락해 밥을 다 먹은 다음 종을 치곤 했다. 왕파가 가면 밥 한 숟가락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밥을 먹은 다음 종을 친다는 뜻의 반후지종(飯後之鐘)이라는 말이 바로 이 고사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에는 비슷한 예가 없을까. 조선 사대부가의 상류 저택으로 왕이 아닌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최대 규모는 99칸 집이다. 임금이 사는 궁궐만 100칸 이상 지을 수 있었다. 전국에 99칸짜리 집들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대개는 건물이 오밀조밀 붙어있어 답답해 보인다. 강릉 선교장은 삼만 평 대지에 여러 건물이 하나의 마을처럼 어우러져 우선 보기부터 시원하다.
 
바깥에서 선교장으로 들어갈 때 솟을 대문 옆으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의 고만고만한 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기거했을까. 보통 큰 저택 행랑엔 그 집에서 일하는 솔거노비들이 기거하는데, 선교장은 거기서 일하는 노비들조차 모두 선교장 대문 바깥에 지은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선교장 안으로 들어가 일을 했다. 일테면 출퇴근 노비들이다.

대궐만큼 큰 집이라 찾아오는 손님도 많고 식객도 많았다. 당연히 사랑채나 바깥채만으로는 방이 부족하니까 손님들도 급수에 따라 행랑에 묵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으니 끼니때마다 상 차리는 것도 큰일이다. 이 집에 손님이 가장 많던 시절에는 상을 차려내는 소반만 몇 백 개였다고 한다. 손님의 신분과 주인의 친소 관계에 따라 상, 중, 하로 분류해서 하급 손님들을 행랑에 재워 보냈다.

귀한 손님이야 당연히 사랑채에 모신다. 지금은 사람들이 저마다 직업이 있고 하는 일이 있으니 어딜 가도 오래 머물 수 없다. 그러나 예전에 서울에서 길을 떠나 선교장을 오가는 손님들은 장기 숙식 손님이 많았다. 서울에서 금강산 유람을 가더라도 반년 이상 놀고 오던 시절의 이야기다. 짧으면 한 달, 길게는 몇 달을 식객처럼 머물다 가는 손님도 있었다. 고급 손님들한테는 계절에 맞춰 새로 옷도 지어주고, 떠날 노자도 챙겨주었다. 지금은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높은 자리로 부름을 받을 사람들이다. 

주인 입장에서 이제 그만 갔으면 싶은 손님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런 손님들은 어떻게 내보냈을까. 서로 점잖은 체면에 그만 가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고 ‘반후지종’의 예처럼 밥 때가 지난 다음 종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 쓰는 방법이 상차림을 달리하는 것이다. 밥의 양을 줄이거나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은 너무 야박하고 저급하다. 예부터 상을 차리는 것도 법도가 있다. 밥을 놓는 자리, 국을 놓는 자리, 반찬마다 놓는 자리가 다 정해져 있다. 상을 차려 올릴 때 반찬 자리를 서로 바꾸어 올린다. 김치 놓을 자리에 간장을 놓으면 나그네도 눈치를 알고 그만 일어서는 것이다. 눈칫밥에도 한량들만의 식객 법도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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