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착한’ 임대인? 이름부터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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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수첩] ‘착한’ 임대인? 이름부터가 틀렸다

    • 입력 2021.08.15 00:01
    • 수정 2021.08.23 17:32
    • 기자명 정원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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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일 기자
    정원일 기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누군가 이렇게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화자가 의도한 코끼리라는 ‘프레임(생각의 틀)’ 안에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레임은 무섭다. 프레임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무의식적으로 사고 방향을 결정짓는다.

    지난해부터 정부와 지자체들이 임대료를 인하한 임대인에게 붙인 ‘착한’ 임대인이라는 훈장에도 프레임은 작동한다. 코로나 장기화로 임대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임대료 인하=착하다’라는 틀이 써지는 순간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임대료 인하를 착하다고 바라보는 시선 이면에는 ‘임대료는 고통이다’, ‘고통을 덜어주는 임대인은 착하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임대인들은 나쁘다’는 은유가 내재한다. ‘착하다’라는 도덕적 개념을 임대인에게 갖다 붙이는 모습은 고위 계급의 도덕적 책임을 의미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연상시킨다. 임대인과 임차인을 갑을 관계로 바라보는 네이밍은 이미 정부가 말하는 ‘상생’과는 거리가 멀다.

    혹자는 “이름 갖고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임대료를 내린 착한 임대인에 대한 미담만큼이나 임대료를 내리지 않은 ‘나쁜 임대인’들에 대한 악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착한 임대인 운동’이 오히려 임차인과 임대인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셈이다.

    취재 중 만난 춘천지역 임대업자 중 상당수는 나쁜, 아니 ‘착해질 수 없는 임대인’이었다. 평생 자영업을 해 연금과 같은 노후 대비 수단 부재로, 빚을 내 작은 건물을 사서 적게나마 세를 받으며 살거나, 코로나로 1년 넘게 임대료 수입이 끊기며 생계유지가 어려워져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누군가 ‘착한 임대인’으로 거론될 때마다 착해질 수 없는 임대인들은 행여 손가락질을 받진 않을까 불안에 떤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착해질 수 없는 임대인들은 점점 더 늘고 있다. 올해 춘천시의 착한 임대인 재산세 감면 신청 수(121건)가 지난해(556건)의 4분의 1도 안된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11월에 추가 신청을 받는다지만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통계도 임대인들의 어려움을 뒷받침한다. 한국 부동산원 통계를 보면 올해 2분기 춘천 대표 번화가인 명동 상권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18.9%로 1분기만에 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건물주=부자'라는 공식은 사상 초유의 팬데믹 상황에 놓인 임대인들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착한 임대인에서 ‘착한’이라는 단어를 걷어내고 나면 거기엔 억만장자 ‘갓물주’가 아닌 평범하게 생계를 영위하는 사업자만이 남는다. 임대인과 임차인은 결국 서로 공존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계약관계다. 소상공인 임차인만큼이나 임대인에 대한 배려와 보호가 필요한 이유다.

    [정원일 기자 one1@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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