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문학 공포증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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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문학 공포증 시대

    • 입력 2021.05.09 00:00
    • 수정 2021.05.10 06:31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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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영어단어 ‘포비아(phobia)’는 그 자체로 무섬증이나 공포증을 뜻하지만, 어떤 단어의 뒤에 붙어서 특정한 공포를 가리키는 접미사로 사용되는 게 보통이다. 소시오포비아(sociophobia)는 사회적 관계를 멀리하는 대인기피증, 에어로포비아(aerophobia)는 아무리 먼 거리라도 항공편 이용을 극단적으로 피하는 비행공포증, 하이드로포비아(hydrophobia)는 물을 두려워하는 공수병(恐水病=광견병)을 나타내는 식이다. 어두움에 대한 병적인 공포를 가리키는 암소공포증(暗所恐怖症:scotophobia)이나 코로나시대에 더욱 기승을 부리는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 같은 것도 있다. 사체 공포증(necrophobia)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하고, 슈퍼히어로의 대명사와도 같은 스파이더맨이 실은 소년시절 거미 공포증(arachnophobia)을 갖고 있었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상징이다.

    얼마 전, 30년 가까이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후배소설가와 통화를 하던 중에 새로운 ‘공포증’ 하나가 만들어졌다. 문학 공포증(literary-phobia) - 누군가 아직 거론한 적이 없어서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게 맞지만, 현상 자체가 만연해 있다는 점에서는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공포증이다. 문학 공포증은 말 그대로 문학을 병적으로 멀리하는 증세다. 시집이나 소설책이 무슨 흉물이라도 된 듯이나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이즈음의 세태가 반영된 이 끔찍한 조어는, 실은 ‘스마트폰 중독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 말이 후배와 나 사이에서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후배의 입에서 “요즘은 출판사들이 문학출판은 하려 들지도 않고, 책이 나와도 팔리지 않는다”는 요지의 얘기가 나온 뒤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어쩌면 거의 동시에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문학공포증”이란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래도, 언제나 그랬듯, 둘 사이의 통화는 문학의 가치와 의미로 충만했다. 그리고 절망적 상황을 딛고 일어설 대책과 희망으로 채워지다가 서로의 건필을 빌며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서 두어 시간, 어쩌면 서너 시간, 나는 꼼짝하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길고 긴 침묵의 시간 동안, 후배와 통화를 하며 나누었던 말들을 곱씹고 되새겼다. 곱씹음과 되새김이 끝나기 무섭게 마치 후퇴키를 누른 것처럼 그 말들이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문학의 가치가 지워지고, 문학의 의미가 지워지고, 절망적 상황을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 대책들이 지워지고, 무지갯빛 희망들이 속절없이 지워졌다. 그리고 문학적 선배들이, 저 아득한 시대를 견뎌왔던 그들의 강철같은 문장들이, 아픔과 절망을 이야기했으나 끝내 우리들 가슴 안에서 위로와 위안의 언어로 치환되던 그들의 속삭임이, 뜨거웠던 그들의 눈물이, 온갖 책들로 둘러싸인 그들의 작업실이, 그 책들보다 몇 십 배나 많고 몇 백 배나 무거웠던 그들의 고뇌가 더 이상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듯 하얗게 스러져 갔다. 그 스러진 잔해 위로 34년을 이어온 내 문학의 삶이 한줌조차 되지 않는 재가 되어 날리는 듯했다. 때로는 치기와 오만조차 사랑스러웠던, 언젠가는 꺾어질 것이니 그래서 더 눈물겨웠던 원고지와 자판 위의 시간들이 회한의 한숨이 되어 가볍디가볍게 떠오르다 사라졌다. 그리고 의문 하나가 남았다. 사람들은 왜 문학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주위에서 ‘책깨나 읽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건 생각해보면 꽤 오랜 일이다. 사라지기 직전의 한동안 그들은 ‘인터넷이나 뒤지고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호되게 질타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질타한 그 ‘사람들’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신문도 읽지 않았다. 자존심과 개성을 그토록 중시하던 그들은 ‘포털이 선별해준 소식들’만을 편식했다. 그 소식들에 대해서조차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얘기하기보다 기발한 댓글들을 더 많이 입에 올렸다. 출판사들이 문학출판을 두려워하는 것도, 책이 나와도 예전처럼 소비하지 않는 것도, 이런 상황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출판밥을 30년이나 먹고 살았던 후배 소설가와 통화를 한 그날, 꽤 깊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컴퓨터를 다시 켜고 소설 한 편을 쓰기 시작했다. 액정을 파먹는 바이러스를 개발한 생물학자 이야기였다. 탈고를 하더라도 출간하기가 힘들지 모르는, 출간을 한다 해도 판매를  장담할 수 없는 가혹한 문학 공포증 시대에, 나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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