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조선의 왕자와 공주들이 배운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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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뒤적뒤적] 조선의 왕자와 공주들이 배운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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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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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옛 사람들은 무슨 책으로 어떻게 공부했을까? 문득 든 의문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지 오래입니다. 와중에 학생들이 제대로 학교에 제대로 가지 못하면서 학력 양극화니 하는 이런저런 걱정들이 나오면서 여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옛 사람들은 서당에서 ‘천자문’으로 배움의 첫 발을 떼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천자문을 마쳤다고 바로 논어 등 사서삼경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아니랍니다. 중국 고전에서 명구와 모범 사례를 가려 뽑은 명심보감, 채근담 등도 있었지만 ‘동몽선습’ 같은 한국형 아동학습서도 널리 쓰였답니다.

지난해 말 선보인 ‘고전과 경영’(고연희 지음, 아트북스)은 말하자면 그런 한국형 아동용 ‘교재’의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재입니다. 한때 조선시대 명문가들의 자녀교육법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부모들의 교육열에 힘입은 덕분이었지요. 이 책은 그런 책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우선 조선시대 아동교육법에 관해 풀어쓴 게 아니라, 원전인 ‘교재’를 풀이하고 깁고 보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전이 고리타분한 경서류가 아닙니다. 그림책입니다. 고전에 가려 뽑은 글과 이를 이미지화한 그림을 나란히 실은 것이 원본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이 조선 후기 왕실의 자제들의 고전 학습용 교재로 만들어진 책이란 점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제왕학 교본이죠. 원전의 이름은 ‘예원합진(藝苑合珍)’으로 영조 때 내로라하는 명필과 궁중 화가들이 쓰고 그렸습니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초택음란(楚澤吟蘭)’ 편을 볼까요. 모함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난 뒤 강에 뛰어들어 죽음을 택한 굴원은 왕조시대 충성과 결백의 상징입니다. 이 글은 ‘초나라의 물가에서 난초를 노래하다’란 뜻으로 강에 투신하기 전 가까이 있던 어부와 나눈 대화가 뼈대입니다.

어부가 그럽니다. “성인은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변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면서 “뭇사람이 모두 취해 있다면 왜 술지게미라도 좀 먹고 박주라도 살짝 먹지 않으셨나요?” 시류를 좇아 타협할 것은 타협해가며 살았어야 한다는 충고였습니다.

이에 굴원은 “어찌 정결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입니까? 차라리 상수의 물에 들어 물고기 배 속에서 장사를 지내리라”라 응수합니다. 그러자 어부는 “창랑의 물이 맑구나. 내 갓끈을 씻을 만하네. 창랑의 물이 탁하구나, 내 발을 씻을 만하네”란 그 유명한 말을 하고 돌아섭니다. 굽혀야 할 땐 굽히는 것도 처신의 요령이란 뜻이겠지요.

여기 붙은 그림은 굴원과 어부가 강변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담았는데 당대 궁중화가 양기성의 작품입니다. 왕실의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어서인지 채색을 하긴 했지만 형상을 단순화하고 알록달록 칠을 한 요즘 아동용 그림책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24편 실렸는데 이 책의 장점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란 점입니다. 국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지은이는 원문을 풀면서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예컨대 굴원의 꼿꼿함과 어부의 유유함을 대비하고 조선시대 문인들은 현실적이며 생존지향적인 어부에게 더 매력을 느꼈던 듯하다며 발을 씻는 ‘탁족도(濯足圖)’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욕보인 뒤에 남이 욕보이고 가정은 스스로 망가진 뒤 남이 망가뜨리고 국가도 스스로 토벌한 뒤 남이 토벌한다”는 맹자의 말이 따르는 건 덤이라 할까요.

얼추 짐작이 가겠지만 이 책은 원전의 의도와 달리 우리 어린이들이 읽을 그림책은 아닙니다. 성인을 위한 어엿한 인문서입니다. 거기에 예술 전문 출판사답게 아주 제대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지 책의 가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제목 탓인지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한 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전 또는 옛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놓치기 아까운 책입니다. 

책 속 한 구절

-“깨끗함은 자리를 지키는 근본이고, 검소함은 몸을 지키는 기본이다.”(정약용, ‘목민심서’)
-“자식에게 한 바구니의 황금을 남겨주는 것이 한 권의 좋은 책과 같지 않다.”(‘한서’ 위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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