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靑魚), 북도·경상도·호남·해주서 나는 네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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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어(靑魚), 북도·경상도·호남·해주서 나는 네 종류가 있다.”

    [김풍기 교수의 도문대작 읽기] 19. 청어, 가난한 선비의 생선

    • 입력 2024.03.30 00:01
    • 수정 2024.04.04 07:58
    • 기자명 김풍기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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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풍기 강원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입맛을 쩍쩍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이 책은 허균의 방대한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저술된 일종의 음식 관련 저술이다. 다시 분류하자면 음식문화를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허균의 고단한 유배지 식탁은 과거 풍성한 식탁 귀퉁이조차도 구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를 극복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었다. 그런 궁핍한 현실 속에서 허균의 미각적 상상력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풍기 교수와 함께 걸작 도문대작을 탐닉한다. <편집자 주>

    20대 후반에 친해진 생선은 ‘청어’다. 지금은 완전히 리모델링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길 없는 서울 종로 뒷골목인 피맛골에서 청어구이를 처음 맛보았다. 공부하느라 돈도 없었지만, 청어 한 마리 구워놓고 이런저런 반찬을 곁들여서 내주는 점심 밥상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성비가 아주 좋았다. 이따금 서점 순례를 마치고 늦점심을 먹어야 했던 가난한 대학원생에게 피맛골의 청어구이 백반은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흐뭇했다. 어쩌다 목에 가시가 박힐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일락 말락 살에 박힌 잔가시를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발라내며 밥을 먹노라면 세상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청어구이를 먹고, 그 뒷골목에 있던 시인통신에서 맥주 한 잔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은 내 젊은 시절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주는 것인지. 담배 연기 자욱한 그곳에서 예술계의 어른들 이야기를 듣거나, 혹은 풋내 가득한 문학론을 마구 이야기하던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청어에 다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허균의 편지에 나오는 작은 구절 때문이다. 사실 그는 절필을 선언한 적이 있었는데, 절친한 벗 권필이 세상을 떠난 1612년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에 정말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선언은 다소 상징적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명확하게 친필 편지로 남아있는 일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장(汝章)이 죽은 뒤로는 하늘에 맹세컨대 시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록 좋은 글귀를 얻는다 해도 어찌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허균(許筠, 1569~1618)은 어느 날 금산부사(錦山府使)에게 편지를 한 통 쓴다. 금산의 원님이 허균에게 시를 한 수 지어 달라, 부탁했는데 그것을 넌지시 거절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여기서 ‘여장’은 허균의 절친한 벗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의 자(字)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으나 변변한 벼슬 하나 한 적 없이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가 그것이 시대를 비판한다는 혐의를 받아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동문 밖에서 첫날밤을 묵던 중 폭음을 하고 죽었다. 이 사건은 허균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이첨(李爾瞻), 유희분(柳希奮) 등 권력자들은 광해군을 옆에 끼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고, 지식인들의 언로는 완전히 막혀 있었다. 권필이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울분에 차서 통음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터인데, 평생을 친한 벗으로 살아왔던 허균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허균 자신도 전라도 함열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겨우 풀려난 뒤끝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으리라.

    그런데 이 편지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구절이 들어있었다. 편지글 끝에 자신의 이름을 쓴 뒤, 무심한 듯 혹은 깜빡 잊었다는 듯 추가해놓은 글귀가 있었다. 청어 두 두름은 연말 선물로 잘 받았다는 짧게 덧붙인 글이었다. 이로 보건대 이 편지는 권필이 죽은 1612년 이후 어느 해 겨울 금산부사가 허균에게 시 한 편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청어 두 두름을 함께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이듬해 정월 허균이 넌지시 거절하면서 이 편지를 보냈는데, 보내온 청어에 대해 아주 무심한 어투로 말미에 덧붙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청어는 모두 4종으로, 모양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각각의 특색을 지닌 것들이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청어는 모두 4종으로, 모양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각각의 특색을 지닌 것들이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허균은 청어를 매우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도문대작’에 청어를 제법 길게 써놓았다. “청어(靑魚) : 네 종류가 있다. 북도에서 나는 것은 크고 배가 희며, 경상도에서 잡히는 것은 등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에서 잡히는 것은 조금 작고, 해주(海州)에서는 2월이 되어야 잡히는데 맛이 매우 좋다. 옛날에는 너무 흔했지만 고려 말에는 쌀 한 되에 40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목로(牧老, 목은 이색을 가리킴)가 시를 지어 그를 한탄하였다. 세상이 어지럽고 나라가 황폐해져서 모든 물건이 부족하게 되자 청어도 귀해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명종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50마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으니 괴이하다.”
    여기서 언급된 목로(牧老)는 고려의 충신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을 지칭한다. 그는 청어를 이렇게 시로 읊었다. “쌀 한 말에 청어 스무 마리 남짓, 끓여오니 흰 주발이 쟁반의 채소를 비춘다. 세상에 맛좋은 것 응당 많으리니, 산 같은 흰 물결이 하늘을 때리는 곳에.” 허균이 40마리라고 한 것은 착오겠지만, 요지는 예전에 흔하던 청어가 귀해지자 그것을 탄식한 것으로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청어는 모두 4종으로, 모양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각각의 특색을 지닌 것들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청어는 시대에 따라 생산량이 들쭉날쭉했는데, 허균 시대에는 거의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청어는 우리나라 모든 해안에서 잡히는 어종이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역마다 토산물을 수록하고 있는데, 청어를 기재한 지역이 많다.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등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해안에서 청어가 잡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가 빠진 것은 아마도 이 지역이 어업보다는 농업을 주력 분야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명종 이전까지는 그렇게 많이 잡히던 청어가 잡히지 않아서 너무 이상하다고 허균은 탄식했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청어의 어획량은 엄청났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명종 이전까지는 그렇게 많이 잡히던 청어가 잡히지 않아서 너무 이상하다고 허균은 탄식했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청어의 어획량은 엄청났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명종 이전까지는 그렇게 많이 잡히던 청어가 잡히지 않아서 너무 이상하다고 허균은 탄식했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청어의 어획량은 엄청났다. 얼마나 흔했는지 이옥(李鈺, 1760~1812)은 자신의 저서 ‘백운필(白雲筆)’에서 가난한 유생들도 청어로 배를 불린다고 해서 청어를 유어(儒魚) 즉 선비들의 물고기라고 부른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선비를 살찌게 만드는 물고기라는 뜻의 비유어(肥儒魚)라는 별칭도 같은 맥락에서 부르는 호칭일 것이다.

     

    가난한 유생들도 청어로 배를 불린다고 해서 청어를 유어(儒魚) 즉 선비들의 물고기라고 부른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가난한 유생들도 청어로 배를 불린다고 해서 청어를 유어(儒魚) 즉 선비들의 물고기라고 부른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돈이 없던 대학원 시절 청어구이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내게도 청어는 유어 또는 비유어로 불릴 만했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는 법인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도 이제는 제법 그리워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 점심이나 저녁때가 되면 생선을 굽는 연기로 가득했던 피맛골도 이제는 사라지고, 담배 연기 자욱하던 가난한 예술인들의 놀이터도 사라졌다. 얼마 전 청어구이에 막걸리를 놓고 시장 한쪽에서 왁자하게 떠들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전히 청어는 필부(匹夫)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그들 나름의 기억을 만드는 소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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