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의 세상읽기]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다
  • 스크롤 이동 상태바

    [돌담의 세상읽기]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다

    • 입력 2020.05.14 06:50
    • 기자명 칼럼니스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학성 강원대학교 명예교수·한국헌법학회 고문
    김학성 강원대학교 명예교수·한국헌법학회 고문

    우주와 생명체의 기원과 관련해 진화론과 창조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기원에 관한 또 다른 주장이 있는데, 유신 진화론(이하 유진론)이다. 유진론은 150여 년 전 유럽에서 출현했는데, 창조주가 진화론적 방법으로 우주 만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진화와 창조는 결코 양립할 수 없기에 유진론과 같은 타협이론은 소멸돼야 마땅하다. 헌데 유진론이 신학의 대세를 점하고 있다니, 납득 공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래된 지층구조에다 그에 상응하는 화석을 그려 넣고 인류를 생물 진화의 결과인 양 표시하는 1872년 라이엘의 지질계통표, 이 한 장의 상상도에 교회가 고개를 떨궜다. 더 나아가 진화론에 무릎까지 꿇는 사건까지 발생했는데 1912년 ‘필트다운 인’ 사건이다. 조작된 가짜 유인원의 두개골이 40년 동안이나 인간 진화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됐기 때문이다.
     
    유진론은 첫째, 창조주는 물질만 창조했고, 물질의 ‘스스로 조직하고 변형’할 수 있는 내재된 속성에 따라 생명체를 낳았다고 한다. 우주는 창조주가 만들었지만 그 구성물은 창조주의 개입 없이 진화의 방식을 통해 생성됐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가 텅 빈 우주만을 창조했다는 것인데 성경 내용에도 어긋나지만, 창조주가 텅 빈 우주만을 만들 이유가 없다. 설계에서 구조, 요소, 운영방법 등의 매뉴얼을 생략하는 설계자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맹목적 진화방식으로 내용을 채웠다고 하는데 이러한 맹목의 메커니즘으로는 사람을 만들어 낼지, 무엇을 만들지 알 수 없다. 사람이 아닌 두뇌가 큰 공룡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맹목의 ‘물고기, 개구리, 뱀, 개, 독수리, 사람’. 맹목치고는 너무 아름답고 놀랍다. 유진론은 사람의 생성이 아무 목적도 없는 채 내 던져진 상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인간적으로도 너무 가혹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고 한다.

    셋째, ‘계획된 진화’ 또는 ‘인도된 진화’를 강조한다. 유진론은 진화과정은 무작위적이지만 진화의 결과는 이미 계획된 것이라는 계획된 진화나 진화가 우연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도된다는 인도된 진화를 주장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연과 무작위’라는 진화의 방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본질적 특성인 ‘우연, 무작위, 무목적성’은 ‘계획, 인도’와 어울릴 수 없다. ‘계획, 인도’는 오히려 창조와 조화를 이룬다.

    넷째, ‘빈틈의 하나님’(God of the gaps)을 비판한다. 창조론은 기원문제에 이르러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면 과학적 방법론을 유지하지 못하고 곧장 창조주를 들먹이며 하나님이 행하신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설명하지 못해도 장래 언젠가는 밝혀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빈틈만 보이면 창조주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의 신비를 접한 결과 과학적 방법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다는 ‘학문적·논리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과학적 설명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도피처로써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유진론은 유신론의 수호자임을 자처한다.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만큼 이를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며, 유진론만이 진화론의 무신론적 입장에 대항해서 유신론을 지키는 길이라고 한다. 고마워 눈물이 날 정도다. 만일 생물학 등 현대 과학이 진화론과 유신론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많은 경우 진화론 대신 유신론을 포기할 것이다. 이는 진화 패러다임이 자기 입장을 단단히 굳히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론이 신을 긍정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신을 부정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섯째, 유진론은 갈릴레이 코스프레를 한다. 교회가 유진론을 비판하는 것을 마치 교회가 갈릴레이를 핍박한 것에 빗대고 있다. 당시 교회가 지동설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교황청이 그를 단죄하고 박해한 것도 맞다. 하지만 이 문제는 교회의 태도 변화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로 해결됐다. 갈릴레이 사건은 교회와 과학의 싸움이 아니라 기존 과학이론과 새로운 과학이론의 논쟁일 뿐이다. 교회가 진화를 부정하는 것은 교회가 정당한 과학적 증거를 배척해서가 아니라 진화가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더 나아가 과학적 원리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는 유진론은 결코 갈릴레이가 될 수 없다.
     
    진화와 창조는 서로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영원한 평행선이며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진리와 비진리에 타협은 없기 때문이다. 유진론은 유신 진화론보다 ‘진화창조론’으로 불리길 원한다. 마치 창조를 거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 한다. 그렇게 부끄러우면 창조를 지지하든지, 진화가 그렇게 미더우면 진화를 지지하든지 해야 한다. 창조와 진화의 중립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거나 능력을 능멸하지 않았으면 한다.

    진화론은 무신론임에도, 진화론에 유신을 합친 것에 대해 비판을 삼가고 있다. 이러한 비판자제는 세력확장을 위한 전략적 ‘적과의 동침’인데 진화론은 흔쾌히 이를 수용한다. 진화에 유신론을 결합한다고 해서 진화를 핵심으로 하는 유진론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이 되지 않듯이. 성경이 다윈주의와 충돌한다고 해서 성경을 포기하는 신앙을 세상이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칭찬할까, 글쎄다.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라고 했다. 성경은 자기 부인을 요구했지, ‘진리의 포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진리는 지켜져야 한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