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삼경의 동네 한바퀴] 흐르는 강물처럼, 속수무책 지나가는 시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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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삼경의 동네 한바퀴] 흐르는 강물처럼, 속수무책 지나가는 시간의 역사

    • 입력 2024.01.25 00:00
    • 기자명 최삼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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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삼경 작가
    최삼경 작가

    벌써 새해 한달이 반도 더 지났다. 유장한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들.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라는 말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했다. 우리는 그저 헤엄을 모르는 아해가 강물을 바라보듯 이 시간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엔 시간이 흔해진 느낌이다. 정확히는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라는 것이 맞겠다. 핸드폰과 컴퓨터 화면의 상·하단이거나 지하철, 버스, 길거리 높은 빌딩마다 “지금의 시간은 이거다!”라고 주입하듯 반짝거린다. 이것도 모자라 손목마다 시계를 차고 전자기기마다 호흡기처럼 시간이 명멸하고 머리맡마다 알람을 울려대는 시계들이 즐비하다. 가히 시간을 칭송하는 현대문명의 찬가가 쉬지 않고 곳곳에서 전자 콘서트를 벌이는 느낌이다.

    현대적 의미의 시계는 처음 단테의 「신곡」에 등장했다고 한다. 1320년의 일이다. 그러다가 14세기 말 기계적 형태의 시계가 만들어졌는데 이때의 시계는 지금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었다. 영주의 저택 높은 망루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고 일을 마치고 잠에 들었다. 물론 도시거주자들을 위한 시계탑도 곳곳에 세워졌다. 조선에서는 1398년 운종가 종루에 큰 종을 매달아 임진왜란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조선의 시계 역할을 맡게 했다. 이처럼 처음 시계는 시간을 일깨워줬을 뿐 사람들에게 강제와 강박을 강요하지 않았다. 밤하늘 별자리 시계나 배꼽시계처럼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운용이 되는 참고서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근대로 넘어오면서 시계, 정확히는 시간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도시의 부유해진 부르주아 계급들의 정확한 시간 관리에 대한 욕구와 맞아떨어졌다. 이에 1780년, 하루를 24단위로 나눈 ‘평균 시간’을 제네바에서 채택하였고 런던, 베를린, 파리, 빈이 이를 따라 하면서 향후 시간 규율과 노동시간 통제가 강화되며 생산성을 높이는 확실한 기제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다소 거칠게는 시계가 출현하면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는 말도 성립하게 되었다. 이후 분업과 컨베이어 벨트는 시간효용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노동시간 밀당으로 지금처럼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이라는 말이 익숙해지다 말다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시간을 측정하고 시간을 관리하는 기계는 발전했는지 몰라도 인류는 여전히 ‘시간’의 본래면목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시간의 시작은 어디이고 지금은 어디쯤을 가고 있고 종내는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왜? 시간이 생겼는지 등등 모르는 점들이 많지만 그냥 모른 척 이를 차곡차곡 서랍에 눠두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공간에 비해서는 시간이 만인 앞에 평등하다. 어떤 나라에,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많은 것을 결정짓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이렇게 일없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지 아니면 아웅다웅 속을 끓이며 살지는 다 제가 할 나름이겠다. 물론 그 태도에 따라 자기 앞에 놓인 시간과 공간들도 달라질 터이지만 말이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최삼경 필진 소개
    -작가, 강원작가회의 회원
    -‘헤이 강원도’, ‘그림에 붙잡힌 사람들’ 1·2, 장편소설 ‘붓, 한자루의 생’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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