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갑의 부동산 투시경] 한국 부자들은 왜 공기 나쁜 도심에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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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갑의 부동산 투시경] 한국 부자들은 왜 공기 나쁜 도심에 살까?

    • 입력 2024.01.22 00:00
    • 수정 2024.01.26 00:21
    • 기자명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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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

    오래전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한 학자가 경부고속도로 인근의 경기도 남부지역에 ‘한국판 베벌리힐스’가 들어설 것으로 예언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서부에 있는 베벌리힐스는 유명 영화배우나 부자들이 많이 사는 초호화 교외 주택 단지다. 그의 예언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교외가 아닌 서울 도심에 베벌리힐스 같은 부촌이 들어선다. 초고가 아파트 단지인 용산구 한남더힐, 한남 나인원이 그 예다.

    왜 한국 부자들은 미국처럼 교외로 나가지 않고 번잡한 도심이나 그 부근에 모여 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과는 다른 교외화(대도시권의 외연적인 확산)가 핵심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국과 다른 방식의 교외화가 한국의 부촌 형성에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미국의 교외화 주체는 백인 중산층이었다. 다시 말해 교외로 빠져나온 계층이 미국 사회에서 주축을 이루는 백인, 그것도 중산층이었다. 그래서 백인 중산층의 교외 이동 현상을 ‘화이트 플라이트(White flight, 백인 탈출)’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백인들이 교외로 빠져나오게 된 이유는 도심지역에서 흑백 갈등이었다. 유색인 저소득층이 도심으로 유입되면서 슬럼화되고 범죄가 일상화하는 등 주거 여건이 극히 악화됐다.

    백인들에게 도심 탈출은 절실한 문제였다. 자녀들을 마음 놓고 교육할 수 있는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 환경이 필요했다. 이들은 자동차를 이용해 발달한 고속도로를 타고 교외로 빠져나와 새 둥지를 틀었다. 교외는 앵글로아메리카 중산층의 집합적 산물, 즉 부르주아 유토피아였다. 교외로 이동은 도시의 부패에서 벗어나 자연과 조화를 회복하고 안정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의식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교외화 과정이 다르다. 한국의 교외화 주체는 대체로 중산층 이하 계층이다. 대부분 나라에서 교외 이주의 동기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아니라 먹고 살고(직장), 싼 집을 구하는(주거)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이 1980년 경기도 양주‧화성‧시흥‧파주‧고양‧광주‧용인‧김포 등으로 이주한 전 서울 거주자 153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이주 동기는 직장(53.3%)이 가장 높고 주택가격(14.0%), 주거 환경(13.7%)이 다음 순서였다. 발전 전망(5.5%), 철거(5.4%), 교통 편리(13.7%)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미국과는 달리 도심에 여전히 부유층이 살고 외곽에는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구조다. 주택가격도 서울 도심에서 벗어날수록 떨어진다. 최근 한 논문을 보니 서울시청(도심)에서 1㎞ 떨어지면 연립주택 가격은 2.1%, 아파트는 1.7%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과의 물리적 접근성은 수도권 주택가격 결정에 유의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부자 동네는 미국이나 영국의 부촌과는 달리 일반 지역과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또 부촌을 형성하고 있는 지리적, 공간적 영역도 비교적 좁은 편이다. 부자 동네에서 골목길을 건너면 바로 평범한 서민층 동네가 나타날 정도다. 계층별 주거지 분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인의 평등 지향적 심성에다 과거 부자 동네가 정치적 부패의 상징으로 존경보다 경멸의 대상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신흥 부자들이 몰려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 지역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러다 보니 한국 부자들은 차별화한 집단 주거지역을 형성하려는 욕구가 강하지 않았다. 정부도 정책적으로 사회적 위화감 등의 이유로 대규모 부촌 형성을 막았다. 물론 우리나라도 분명 부자 동네는 있다. 하지만 미국처럼 애초 지을 때부터 구획화, 블록화한 부촌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어쩌다 아파트값이 오르니 자연스럽게 부자 동네가 된 것 같다.

    이렇듯 부촌은 그 나라 경제와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달리 분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주택시장의 핵심 수요층으로 떠오른 MZ세대는 도심 선호 현상이 유난히 강하다. 그래서 멀리 내다봐도 우리나라 교외에는 큰 부촌이 생길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 보인다. 취미를 같이하는 고급 동호인 주택 정도는 들어설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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