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삼경의 동네 한바퀴] ‘생각의 이익’ 또는 ‘이익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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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삼경의 동네 한바퀴] ‘생각의 이익’ 또는 ‘이익의 생각’

    • 입력 2023.12.28 00:00
    • 수정 2024.01.22 09:39
    • 기자명 최삼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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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삼경 작가
    최삼경 작가

    해마다 교수신문은 연말에 그 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를 만들어 발표를 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견리망의(見利忘義)’로 정했다고 한다. 「장자」 편에 나오는 얘기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올 한해는 저마다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데 한 치 망설임이 없던 해였다.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교육계의 ‘진상’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한 올의 불이익이라도 묻을세라 난리를 폈고, 장관자리에 들어서는 이들마다 불법·탈법의 정도를 높낮이로 따져야 했다. 물론 이 논의의 정점은 ‘반환선물’이라는 전대미문의 말을 새로이 유지시키는 이들에게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도대체가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가 됐다. 일테면, 견리망의 사회로 가기 전에 ‘견리사의(見利思義)’의 단계쯤을 거쳤을 것 같다. 이익을 취할 때는 옳음을 생각하자는 것인데, 이제 이 옳음이 더 설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불현듯 쌍둥이처럼 떠오르는 것이 ‘공정’이다. 이 ‘옳음’과 ‘공정’은 아직도 그 청정한 뜻이 거룩한 것인데 아무도 따르는 병사가 없는 장군이 된 모양새다.

    문제는 기실 ‘생각’이다. 옳음을 생각하고 공정을 생각하고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데 또 그 밖의 사방팔방 종횡으로 엮인 계산의 돌다리를 두드리다 결론의 무게추가 점점 이익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겠다. 종종 사람들은 이것을 세태(世態)라고 표현을 한다. 

    그렇다면 생각이라는 것을 잘 해야 하는데 과연 그 생각은 무엇일까. 관련해서 자타카에 나오는 ‘앙굴리말라’라는 고사가 떠오른다. 앙굴리말라는 붓다와 동시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인성을 갖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는데 훗날 흉악한 연쇄살인범이 되었다. 그래서 ‘아힝사까’라는 본 이름조차 가려지고 사람을 죽이고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뜻을 가진 ‘앙굴리말라’가 됐다.

    그를 처단하기 위해 군대까지 출동하는 것을 보고 붓다가 나서서 그를 설복시켰고 앙굴리말라는 붓다와의 대화로 단번에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런데 그렇게 현명하고 운동도 잘했던 아힝사까가 어떻게 앙굴리말라가 되었던 것일까. 그가 앙굴리말라가 된 결정적 이유는 스승의 지시였는데 그의 잘남을 시샘한 동료들의 모함으로 스승은 그에게 ‘백 명을 죽여라’라는 명을 내렸고, 그는 이 말을 따라 희대의 살인마가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의 동료들이나 그의 스승 또 그가 사안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생각’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명민한 제자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함을 스승이 의심해 보았더라면, 아니 그의 동료들이 질투를 하기 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반면교사를 삼았더라면, 스승의 명이더라도 상식에 비추어 지혜로웠더라면⋯ 그렇다면, 애꿎은 양민 99명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이야기 자체가 후세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이름을 흑역사에 남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두 ‘생각’이란 것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제발 새해에는 자신들의 이익보다 나라 전체의 옳음과 공정을 먼저 생각해 주기를⋯.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최삼경 필진 소개
    -작가, 강원작가회의 회원
    -‘헤이 강원도’, ‘그림에 붙잡힌 사람들’ 1·2, 장편소설 ‘붓, 한자루의 생’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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