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로 본 춘천 姓氏] 춘천이 본관인 ‘O씨’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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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계로 본 춘천 姓氏] 춘천이 본관인 ‘O씨’를 아시나요?

    춘천 본관 성씨 8개⋯현재는 ‘춘천 박씨’만 남아
    박혁거세 손 시조는 ‘박항’, ‘퇴계 이황’과도 연관
    성씨 145개, 김·이·박 43.8%⋯5명뿐인 성도 존재
    홍·지·허씨, 유독 다른 지역보다 비율 높아

    • 입력 2022.09.10 00:02
    • 수정 2022.09.13 00:08
    • 기자명 진광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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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땅에 사람이 살고 있던 시기는 선사시대부터지만 성씨의 시작은 한자 문화가 유입된 삼국시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 초기에 지금과 유사한 성씨 제도가 정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상을 기리는 민족 최대 명절 추석을 맞아 15년마다 발표하는 ‘인구총조사 성씨 통계’를 활용해 춘천의 성씨와 본관 이야기를 담아냈다. <편집자주>

    ▶춘천시민 성씨(姓氏) 145개⋯홍·지·허씨는 유독 많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를 분석한 결과 춘천에는 현재 145개의 성씨가 존재한다. 가장 많은 성씨는 ‘김(金)씨’ 5만5926명(20.1%), ‘이(李)씨’ 4만2424명(15.2%), ‘박(朴)씨’ 2만3659명(8.5%) 순으로 전체의 43.8%를 차지했다.

    김·이·박씨 이외에 춘천시민들은 ‘최(崔)씨’ 1만6871명(6.0%), ‘정(鄭)씨’ 1만1701명(4.2%), ‘조(趙)씨’ 6160명(2.2%), ‘윤(尹)씨’ 5893명(2.1%), ‘장(張)씨’ 5573명(2.0%) 순으로 성씨를 갖고 있다.

    100명 미만의 ‘희귀 성씨’ 중 가장 인구가 적은 하위 성씨는 ‘범(范)’ 5명, ‘당(唐)’과 ‘좌(左)’ 각 7명, ‘단(段)’ 11명, ‘갈(葛)’ 12명 등이었다. 두 글자로 된 성씨는 ‘남궁(南宮)’ 629명, ‘선우(鮮于)’ 62명, ‘황보(皇甫)’ 44명, ‘사공(司空)’ 22명, ‘제갈(諸葛)’ 12명 등이 존재했다.

    특히 춘천에는 ‘홍(洪)씨’ ‘지(地)씨’ ‘허(許)씨’를 가진 시민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홍씨’는 4295명으로 전체 1.90%(전국 평균 1.10%)를 차지해 전국 시군 중 홍씨 분포율 7위다. 지씨는 1909명이 존재해 0.74%로(전국 평균 0.31%) 분포율 7위다. 허씨는 2698명으로 전체 1.04%(전국 평균 0.65%)로 전국 중 22위에 해당한다. 홍씨와 지씨는 각각 만천리와 송암동 일대에 집성촌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허씨는 해방 이후 춘천에 많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성씨별 가장 많은 본관은 어디일까. 김(金)씨의 본관은 ‘김해’(34.5%), 이(李)씨는 ‘전주’(42.8%), 박(朴)씨는 ‘밀양’(64.8%), 최(崔)씨는 ‘강릉’(36.9%)이다.

     

    춘천지역 성씨별 인구수 현황. 김씨, 이씨, 박씨 순으로 전체 43.8%를 차지했다. (그래픽=박지영 기자)
    춘천지역 성씨별 인구수 현황. 김씨, 이씨, 박씨 순으로 전체 43.8%를 차지했다. (그래픽=박지영 기자)

    ▶춘천을 본관으로 한 대표 성씨(姓氏) ‘춘천 박씨’

    춘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도 존재한다. ‘춘천 O씨’는 김, 도, 문, 박, 송, 이, 임, 장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 남은 춘천 성씨는 박씨뿐으로 2015년 통계 기준 춘천에 1959명의 ‘춘천 박씨’들이 살고 있다.

    춘천을 관향으로 한 박씨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춘천 박씨의 시조는 고려 충신 문의공(文懿公) 박항(朴恒)이다. 박항은 박혁거세의 29세손으로 고려 고종 14년(1227)에 춘성군 장본리(현재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에 등용됐고 정1품직 삼중대광(三重大匡)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 후손들이 춘천에 대를 이어 살면서 본관을 춘천으로 했다. ‘문의공 박항묘역’은 신북읍 발산리 일대에 있다.

    고려 시대를 다룬 조선의 사서 <고려사>에는 박항과 춘천이 얽힌 이야기들이 나온다. 몽고군의 춘천 침입 때 서울에 있던 박항은 춘천에 있는 자신의 부모까지 죽었다는 소식에 바로 춘천을 찾았으나 시신은 없었고, 대신 수백 구의 시신을 모아놓고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많은 관민이 굳은 의기로 항거했으나 ‘봉의산성’이 함락하자 적에게 굴하고 욕되게 사느니 자결하겠다며 모두 함께 피를 뿌리고 전사했다고 한다. 그들이 항거한 산은 봉의산이며, 당시 춘천 박씨를 비롯한 수많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봉의산 순의비’다.

     

    퇴계동의 위치한 춘천박씨종친회. 현재 춘천에는 '춘천 박씨' 1959명이 살고 있다. (사진=진광찬 인턴기자)
    퇴계동의 위치한 춘천박씨종친회. 현재 춘천에는 '춘천 박씨' 1959명이 살고 있다. (사진=진광찬 인턴기자)

    ▶퇴계(退溪) 이황 키운 어머니도 ‘춘천 박씨’

    춘천 박씨는 퇴계(退溪) 이황과도 연관이 있다. 퇴계는 문의공 5대손인 사정공 박치(朴治)의 외손자로 그의 어머니가 춘천 박씨다.

    특히 퇴계 어머니인 박씨 부인은 퇴계라는 조선의 대학자 등장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퇴계는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박씨 부인은 홀로 7남매를 책임지며 자식들이 편모 자식 소리를 듣지 않도록 몸가짐과 학문연마를 독려했다. 그런 가르침을 깊게 새긴 퇴계는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오르며 대학자로 자랐다. 춘천 박씨 부인은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단한 삶의 지혜를 갖고 세상을 읽은 부인으로 여겨진다.

    춘천 퇴계동이 퇴계의 외가 마을로 그가 자주 방문한 곳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퇴계가 청평사를 찾은 기록은 남아있다.

    [서충식 기자·진광찬 인턴기자 seo90@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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