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마음풍경] 125살의 할아버지
  •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이순원의 마음풍경] 125살의 할아버지

    • 입력 2021.08.08 00:00
    • 수정 2021.08.09 00:03
    • 기자명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100살도 아니고 125살이라니. 이 연세의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실 수는 없다. 돌아가셔도 벌써 돌아가셨다. 우리 나이로 125살이면 1897년,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던 해에 태어나신 분이다. 이 해에 태어난 할아버지라면 돌아가셔도 벌써 돌아가셨다. 옛날 분이어도 한참 옛날 분이다.

    그런데도 우리 집 오남매는 일상생활 속에 수시로 할아버지 얘기를 한다. 제일 큰형이 일흔세 살이고, 막내가 올해 환갑인, 그러니까 61~73세 사이의 점차로 노년에 접어든 오남매가 핸드폰 속에 대화방을 만들어 수시로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날은 남매간의 나눈 대화가 100개 200개도 넘을 때도 있다.

    그 이야기 속에 어김없이 나오는 분이 할아버지시다. 엊그제는 고향마을에 낙향하여 사는 넷째가 옛집의 배롱나무 사진을 찍어 올렸다. 때마침 붉게 핀 꽃도 엄청나지만 나무 굵기도 엄청나다. 우리는 어릴 때 그 나무를 간지럼나무라고 불렀다. 바람 고요한 날 나무 밑동을 간질이면 제일 꼭대기의 나뭇잎이 움직인다.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인데 어느 시절에 심은 나무인지 아는 형제가 없다. 당연하다. 그 나무는 올해 93세인 어머니가 시집올 때에도 사랑 마당가에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열세 살에 결혼하여 열네 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주권이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가 나라 이름이 없어지던 해 집 주변 민둥산에 알밤 다섯 말을 심어 커다란 밤나무 농장을 일구신 분이다. 집 안팎에도 나무를 엄청 많이 심으셨다. 봄부터 과일 익는 순서로 따지면 앵두나무, 매화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포도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밤나무, 호두나무, 석류나무, 모과나무까지 없는 나무가 없었다. 나무를 심더라도 꼭 열매가 달리는 나무를 심었다. 열매가 달리지 않는 나무로 좋아한 것은 배롱나무뿐이었다. 그 나무를 유학(儒學)하는 집안의 자미수라고 좋아했다.

    넷째가 배롱나무를 찍어올리자 당연히 할아버지 얘기가 나왔고, 다음날 어느 형제가 정원에 거뭇거뭇 익어가는 포도나무 사진을 올리자 우리는 다시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공중그늘막처럼 심어 가꾼 포도나무 이야기를 했다. 포도가 조금씩 익어가면 어린 손주들이 포도나무 아래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푸른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포도를, 그러나 아직 익지 않은 포도를 한 알씩 빼어 먹으면 할아버지가 이 포도는 어느 조상님 제사를 지낼 때까지는 건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 조상님 제사가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던 무렵인데 논의 벼가 아직 익지 않은 시기였다. 할아버지가 논으로 나가서 이제 익어가기 시작하는 풋벼 두 단을 베어와서 그네(강철로 빗살처럼 촘촘히 날을 세우고 그 사이로 이삭을 훑어내는 기구)로 낟알을 거둔다. 낟알도 푸른색과 누런색이 절반이어서 아직 진물이 배어 있다. 그걸 껍질째로 가마에 볶아 다시 절구나 디딜방아로 껍질을 벗겨낸다. 쌀이 하얗지 않고 연두색을 띤다. 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정말 조상님 모시는 일을 신을 모시는 사제처럼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형제들도 아버지 어머니 얘기보다 할아버지 얘기를 할 때가 더 많다. 누가 해바라기 사진을 찍어올리면 예전에 할아버지가 씨앗을 얻기 위해 빈터 곳곳에 심었던 꽃판이 사자머리만한 해바라기 이야기를 한다. 낙향한 형제는 그 추억으로 자기 집 안팎에 해바라기를 심어 수시로 사진을 찍어 형제들 대화방에 올린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우리는 할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들으며 추억이 쌓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추억은 우리보다 우리 아들딸들이 아버지와의 사이에 많이 쌓여있다. 그러나 내 자식도 그렇고 조카들도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형제들은 대화중에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게 아직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들이 살아 있고 거기에 그냥 추억만이 아니라 어떤 교훈들이 함께 해서인 것 같다. 125살의 할아버지는 여전히 나무와 함께 우리 곁에 계신다. 많은 나무들이 수명을 다해도 배롱나무는 할아버지의 상징나무처럼 더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