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어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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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시네마] 어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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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0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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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특별한 영화다. 2017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아서도 아니고 획기적인 내러티브실험을 시도했거나 혹은 연출에 있어 미학적 성취가 대단해서도 아니다. 특별한 이유는 어느 가족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에 있어서 뚜렷한 교집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유수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의 영예를 차지한 대개 영화들의 공통점은 보편성의 관점에서 소통 가능한 경향을 띤다. 특별히 지역성이 반영되더라도 인류보편의 정서를 건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플롯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구조화되었더라도 감성적인 영역에서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해진다. 쉽게 말해 보는 이가 없다는 말이다. 

영화는 논문이 아니다. 정서와 윤리에 호소하거나 혹은 인식에 혼란을 주는 장치를 통해 우리의 무의식을 건든다. 때론 허구 속에서 무엇보다도 지독한 현실과 조우케 한다. 감독이 구현해 놓은 편집증적 공간에서 두어 시간 남짓 강박을 경험하게 된다. 어느 가족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방식이 작동하는데, 도대체 ‘이 가족은 어떻게 해체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기대로서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된다.

영화의 시작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망을 보아가며 경쾌하게 마트에서 도둑질을 한다. 귀중한 금붙이나 대단한 물건을 훔치는 게 아니라 식료품과 일상생활용품들이다. 말하자면 생계형 좀도둑이다. 이들 부자가 가져온 인스턴트식품들로 다섯 명의 가족들(할머니, 부부(夫婦), 처제, 아들)은 만찬을 즐긴다. 일용할 양식이다. 

극의 도입부는 이렇게 가난의 문제를 물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극심한 빈곤을 바라보는 것은 대개의 중상의식을 가진 관객들에겐 일종의 상대적 안정감의 감정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평정심을 유지한 채 사회구조의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나길 기대하게 된다. 일종의 시민의식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이 가족은 가족이 아니다. 극이 전개될수록 양파껍질처럼 이들 가족이 혈연을 매개로한 관계가 아님이 밝혀진다. 사건의 발단은 유리라는 이름의 다섯 살 여아를 데리고 오면서다. 여느 때처럼 훔친 물건을 가방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집 베란다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상황, 무턱대고 아이를 데리고 온다. 그리고 자연스레 유리라는 아이는 이들 가족의 일원이 된다. 이 과정 중에 아이의 상황에 이입하는 가족들의 면면이 드러나게 되는데, 가족 구성원 모두 각자의 사연과 상처가 있는 처지임이 밝혀진다. 이들 가족은 생면부지의 사람들끼리 그때그때 우연한 일로 의지하게 되고 급기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공교롭게도 삼대로 구성된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비춰진 것뿐이다.

등장인물들 어느 누구도 객석을 향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을 일반적인 의미의 가족이라 여긴 관객들은 이들의 ‘관계’가 아닌, 그들이 직면한 가난과 부조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궁극적으로 가족 간의 이별 혹은 해체라는 비극이 어떻게 시작될지에 마음 조리던 관객들은 이제 이들의 ‘사연’에 시선을 돌린다. 힌트는 이미 주어져 있다. 유리다. 

유리가 입양 아닌 입양이 되는 과정을 지켜본 관객은 이들 가족 구성원 저마다의 사연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의 절도행위는 점점 대담해져 가고 뻔뻔해져 간다. 아내는 세탁공장에서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훔치고, 처제는 성(性)을 팔고 할머니는 어디선가 출처불명의 돈을 받아 온다. 물론 이들은 정식부부도 아니고 자매간도 아니며 조모관계도 아닌 어떤 혈연이나 인척관계가 없는 이들임이 밝혀진다. 

따라서 처음의 질문은 수정되어진다. 이들은 어떻게 해체되었나가 아니라, 이들은 어떻게 결속되게 되었나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전이된다. 이들 모두는 자의건 타의건 누군가를 떠나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전의 가족이다. 폭력적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고,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가출한다. 남편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늙은 몸을 이끌고 위자료와 같은 연금으로 생의 마지막을 연명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존의 가족 간에 벌어진 부조리보다 현재 이상해 보이는 동거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응집된 ‘사회적 부조리’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로써 영화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우리를 코너에 몰아세운다. 가족이라는 보편의 문제를 인류애라는 보편의 정서로 윤리적 차원에서 다룬다. 

곧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누구보다도 잔혹하다. 너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나아가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일삼는다. 가족을 이루는 과정에서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가족을 매개로한 어떤 결과나 성과에 맹종한다. 따라서 충만함은 늘 요원한 문제다. 어느 가족에서 이들 가족은 좁디좁은 툇마루에 얼굴을 디밀고 밤하늘을 바라보지만 불꽃놀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니 그래도 행복하다. 소리만으로도 충만하다.

이들의 일상을 통해 영화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연대가 아니라 위계의 가족은 만연한 질서의 기초로서 국가라는 권력을 지탱한다. 그것이 세금의 단위이건 혹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역할을 하건, 또는 소비의 기본적 단위가 되건 체제유지에 있어 어느 모로 보아도 유용한 제도로서 발명품이다. 

이들 가족이 불온한 취급을 받는 이유는 체제유지에 반하기 때문이다. 등록되지 않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등록된다는 것은 세금의 기본 단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일하게 등록된 이는 할머니이나 그녀는 이제 연금을 받는 나이가 되었다, 국가의 관리대상이다. 같은 이유로 죽어서도 살아있는 것으로 이들 가족을 부양한다. 연금을 타기 위해서이다. 등록되지 않은 다른 가족구성원들이 할머니의 성인 시바타를 가명으로 쓰는 이유이다.  

영화의 원제목은 ‘훔치는 가족’(万引き家族)이다. 도둑가족이라는 번역도 가능하겠지만 가족을 훔쳤다, 즉 가족을 도용했다 쯤으로 해석하는 게 적절할 듯싶다. 다시 말해 이들이 훔친 물건보다 불온한 것은 가족이다. 극중 가족의 엄마역할인 노부요는 학대받던 유리를 데리고 살 결심을 하고 이름을 린으로 바꿔준다.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가족을 재 정의한다. 일종의 ‘유대’  혹은 ‘연대’ 쯤. 

고레에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보편의 문제에 화두를 던짐과 동시에 일본사회가 제도적으로 연대가 어려운 관료주의사회라는 점을 행간에 숨겨두고 있다. 위계를 중시하는 사회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두려워한다.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수직이 쓰러진 것이 수평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코로나사태로 일본정부 특유의 권위주의태도는 위태로워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일본내부의 ‘새로운 Z세대’로부터 외면당한지 오래이지 않을까싶다. 영화 ‘어느 가족’을 징후로 해석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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