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가는 길⋯“아빠, 패륜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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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고랜드 가는 길⋯“아빠, 패륜이 뭐야?”

    [칼럼] 김성권 콘텐츠뉴스국 부국장

    • 입력 2023.07.13 00:00
    • 수정 2023.07.13 17:49
    • 기자명 김성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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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대교를 건너면 시뻘건 바탕에 ‘레고 패륜랜드’라고 쓴 현수막이 레고랜드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강력범죄 뉴스에서나 접하던 문구가 눈에 들어왔을 땐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도로 곳곳엔 이런 현수막이 몇 개 더 걸려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주차장에 내려 정문으로 걸어가는 중간에도 험악한 현수막과 피켓이 여기저기 내걸려 있다. 아이들의 눈을 가려줘야 할 정도다. 레고랜드를 ‘사형장’이나 ‘수용소’로 비유하거나, “유적지 위에서 놀면 얼이 빠진다. 얼이 빠지면 바보가 된다”며 레고랜드에 놀러가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표현까지 목격된다.

    길을 걸어가는데 “아빠, 패륜이 뭐야?”, “나 레고랜드에서 놀면 바보야?”라며 물어보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제 막 한글을 뗀 예닐곱 살 정도의 아동에게 뭐라 설명하기도 난감한 표현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온 부모들은 이내 눈을 찌푸린다.

    사실 현수막 문제는 레고랜드뿐이 아니다. 선거철도 아닌데 도심 곳곳에 걸린 정당 현수막은 이젠 공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대기업 사옥 주변에도 비방, 욕설이 담긴 온갖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해도 레고랜드 앞 현수막을 단순히 공해로 넘기기 어려운 이유는 아이들이 지나는 길이라서다. 어른이 보기에도 불편한데 아이가 저런 말을 배울까 걱정된다. 보지 않을 수 없어 아이들에겐 일방적인 폭력으로 느껴진다. 레고랜드 개장 후 1년간 100만명이 이런 ‘시각적 폭력’을 당했다.

    이 현수막들은 중도개발 반대단체가 ‘역사유적을 지키자’며 내걸었다. 개장 할 때부터 지금까지 1년이 넘도록 설치돼 있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세어보니 족히 20개 가까이는 됐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노숙 텐트도 여전히 널브러져 있다.

    춘천 하중도 레고랜드로 가는길 도로표지판 아래에 '레고 패륜랜드'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MS투데이 DB)
    춘천 하중도 레고랜드로 가는길 도로표지판 아래에 '레고 패륜랜드'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MS투데이 DB)

    올 봄에 갔을 때는 ‘레고랜드=호로XX 랜드’라는 입에 담기 힘든 욕설까지 눈에 띄었다. 그나마 심한 표현을 쓴 현수막 몇 개를 철거하고 남은 게 패륜이나 사형장이다. 최근에는 “(레고랜드가) 아이들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공포스러운 문구도 새로 걸어놨다.

    현수막을 본 한 아이의 아빠는 “주장하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닌데 표현이 너무 지나치다. 조상 묘를 팠다거나 혐오감을 줄 수 있는 현수막을 걸어두는 건 누구에게도 좋은 말을 듣기 어렵다”고 말했다. “애들 다니는 길에서 뭐하는 짓인지”라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관광객도 있었다.

    참다 못한 춘천시민들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비난한다. 시민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처음엔 한편으론 이해도 됐지만, 이제는 도를 넘어섰다. 적당히좀 하자. 관광도시 춘천에 먹칠을 한다”고 분개하는 글이 넘쳐난다.

    시민들이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현수막이 설치된 시위 장소가 아이들이 방문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성인을 포함한 누적 방문객이 100만명이라면 1년간 적어도 수십만명의 아동이 패륜이라는 단어를 보고, 호로XX라는 욕설에 노출된 셈이다.

    정부도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만큼은 현수막은 설치를 금지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마련한 가이드라인을 보면 어린이·노인·장애인 보호구역에서는 정당 현수막을 걸 수 없다. 각종 비방이나 욕설이 담긴 정당 현수막이 아이들의 공간인 초등학교 근처까지 침범하자 규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레고랜드 가는 길도 아이들의 놀이 공간인 만큼 엄연히 어린이 보호구역이다.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갈등과 논란은 풀어야할 숙제지만, 이렇게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곤란하다. 아이들의 정서를 훼손시키는 폭력이나 다름없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합법적이고, 정당할 때 존중받는다. 그러나 상식을 벗어난 혐오 표현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할 수 없다.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면 엄정한 법 집행 외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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