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고작 만 원짜리?···실종된 ‘춘천시향’의 품격
  • 스크롤 이동 상태바

    [기자수첩] 고작 만 원짜리?···실종된 ‘춘천시향’의 품격

    • 입력 2022.04.18 00:01
    • 수정 2022.04.19 00:42
    • 기자명 권소담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자는 퇴근 후 부랴부랴 춘천문화예술회관으로 향했다. 지난 14일은 한 달 전 예매해둔 춘천시립교향악단의 제160회 정기연주회가 있는 날이었다.

    올해 초 취임한 송유진 춘천시향 상임 지휘자는 이번 시즌 프로그램 기획 의도를 ‘처음이거나 유일한 곡’으로 구성하겠다고 했다. 그 포부답게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대 음악을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공연으로 마련됐다.

    프로그램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시바 여왕의 귀환’, 하이든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더 그레이트’로 구성했다. 공연의 입장료는 단돈 만 원이다. 춘천시민이라면 30% 할인받아 7000원에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이다.

    ▶“이거 좀 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이제 막 귀가 열린 클래식 새내기는 겸손하다. 공연에 가기 전 유튜브를 보며 공연 프로그램을 예습하고 곡에 대한 정보도 찾아 읽었다.

    공연장에 도착해 프로그램 북을 펼치자마자 익숙한 문장의 나열이 이어졌다. 조금 전 ‘나무위키’에서 읽었던 작품 소개와 일치했다. 일부 문장을 하나로 이어 윤문(潤文)한 정성은 보였다. 각주까지 옮겨오지는 않았으나 문장의 구성과 표현이 정확히 같았다. 자료의 출처는 표기하지 않았다.

    지난 14일 열린 춘천시립교향악단 제160회 정기연주회 프로그램 북 중 일부 내용. (사진=권소담 기자)
    지난 14일 열린 춘천시립교향악단 제160회 정기연주회 프로그램 북 중 일부 내용. (사진=권소담 기자)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 등은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집단지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지만, 익명성이 보장된 만큼 사실관계의 신빙성이나 전문성 여부 문제가 공존한다.

    이날 관람료를 내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로 공연을 이해해야 했다. 프로그램 북은 지자체의 지원으로 마련된 시립교향악단의 공식 자료다. 저작권 문제와도 직결된다.

     

    나무위키 웹사이트의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에 대한 설명. (사진=나무위키 웹사이트 갈무리)
    나무위키 웹사이트의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에 대한 설명. (사진=나무위키 웹사이트 갈무리)

    ‘기자의 직업병’이라고 해도 좋다. 춘천시향 소개 글의 오·탈자와 협연자 안내문의 주술 관계가 맞지 않는 비문(非文)까지 언급하지는 않겠다.

    ▶슈베르트 ‘더 그레이트’, 교향곡 8번? 9번?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의 작품번호 944번 ‘더 그레이트’를 ‘교향곡 제8번’으로 소개한 것은 국내 관례에 맞지 않는다.

    작곡가 사후 미발표곡이 발굴되며 슈베르트의 교향곡 번호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국내에서는 ‘더 그레이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작품번호 759번 ‘미완성’을 슈베르트의 여덟 번째 교향곡으로 인식한다.

    춘천시향이 작품 설명을 옮겨온 나무위키 웹사이트 글의 제목은 ‘교향곡 제9번(슈베르트)’이었다.

    해당 글의 하단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교향곡을 슈베르트 교향곡 9번으로 표기하지만, 독일‧오스트리아에서는 이 교향곡을 8번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주류이다. 세계적으로 이 작품을 9번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최근 독일에서는 아예 이 작품의 넘버링을 빼고 표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설명도 이어진다.

    위 설명대로 국내 다수의 교향악단에서는 슈베르트 작품번호 944번 ‘더 그레이트’를 ‘교향곡 9번’으로 취급한다.

     

    지난 2019년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 포스터. 슈베르트의 '그레이트'를 교향곡 9번으로 표기하고 있다.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지난 2019년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 포스터. 슈베르트의 '그레이트'를 교향곡 9번으로 표기하고 있다. (사진=서울시립교향악단)

    지난 2019년 2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크리스티안 바스케스 지휘로 열린 서울시향 공연의 제목은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였다. 이어 지난해 7월 역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된 KBS 교향악단 제768회 정기연주회 ‘김선욱의 모차르트‧슈베르트’에서도 해당 곡을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C장조 D.944 그레이트’로 소개하고 있다.

    국내 관례와 달리 독일의 사례를 들어 슈베르트의 이 작품을 ‘교향곡 8번’으로 표기하고자 했다면 그 이유와 배경을 명확히 제시했어야 했다. 누가 썼는지 확인할 수 없는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작품 소개를 긁어올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882년 공연 당시 프로그램 북 아카이브 자료에 삽입된 슈베르트 교향곡 9번에 대한 설명. (사진=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882년 공연 당시 프로그램 북 아카이브 자료에 삽입된 슈베르트 교향곡 9번에 대한 설명. (사진=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세기부터 시작된 역대 공연에 대한 아카이빙 작업을 하면서 2014년 당시 슈베르트 교향곡 9번이 삽입된 모든 자료에 “슈베르트 교향곡 다장조 작품번호 944 ‘더 그레이트’는 원래 교향곡 7번으로 여겨졌으나 나중에는 교향곡 9번으로 알려졌다”는 설명을 덧붙여 뒀다.

    이런 정성까지 바란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만 원짜리 공연이라도 관객들은 제대로 된 공연 소개 글을 읽을 권리가 있다.

    ▶주최 측 실수, 터져 나온 ‘모른다 박수’
    ‘관크’는 ‘관객’과 ‘크리티컬(critical)’의 합성어로 영화관이나 공연장에서 타인의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를 뜻하는 신조어다.

    이날 공연은 ‘관크’가 아니라, ‘주최‧주관 측의 크리티컬’이 공연장을 지배했다. 2부 공연의 슈베르트 교향곡 ‘더 그레이트’ 3악장 연주 도중 공연장 내 스크린에 4악장이 시작했다는 안내가 노출됐다.

    3악장이 끝나자 해당 화면을 보고 모든 연주가 종료됐다고 인식한 관객들 사이에서 일명 ‘모른다 박수’(악장 사이에 치는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3악장은 ‘스케르초 아주 힘차고 빠르게’, 4악장 역시 ‘아주 힘차고 빠르게’ 연주한다. 악장 사이 길어진 박수로 인해 절정으로 치닫던 연주의 맥이 끊겼다.

    이날 1부 공연에서 하이든의 바이올린 협주곡 다장조 작품번호 1번을 협연한 송지원 바이올리니스트는 정기 연주 후 한 곡의 앙코르 연주를 선보였다. 통상 클래식 음악 공연장에서는 앙코르 곡명을 적어 관객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안내하지만, 공연 직후 춘천문화예술회관 어디에도 앙코르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앙코르 곡 안내. (사진=권소담 기자)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앙코르 곡 안내. (사진=권소담 기자)

    기자는 공연 직후 춘천시립예술단 측에 ‘1부 협연자의 앙코르 곡명이 무엇인지’ 질의했으나 관계자는 “내일 협연자에게 확인한 후 안내하겠다”고 했다. 이날 공연이 끝날 때까지 주관 기관 측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어떤 곡이 연주됐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문화도시 춘천’의 현주소다.

    입장권 만 원짜리 공연이라고 해서 춘천시향의 품격까지 만 원짜리여선 안 된다. 시립교향악단을 운영하는 춘천시립예술단에 편성된 올해 사업비 예산은 11억5800만원이다.

    [권소담 기자 ksodamk@mstoday.co.kr]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