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은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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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의 뒤적뒤적]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은 요리”

    • 입력 2022.04.04 00:00
    • 수정 2022.04.04 10:51
    • 기자명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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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봄기운이 제법 완연해졌습니다. 코로나니 뭐니 정신 사나웠던 겨울 동안 움츠렸던 어깨를 펴볼 만합니다. 마침 보탬이 될 책을 만났습니다.

    『식탁 위의 고백들』(이혜미, 창비), 옥탑방에서 식물들과 함께 산다는 시인의 에세이집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음식에 관한 글들이죠. 그러니 당근, 토마토 같은 식재료에서 종이 포일로 재료들을 감싸 오븐에 구워 만드는 파피요트, 설탕 시럽에 감싸인 밤 디저트 마롱글라세 등 이국적인 요리들이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한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요리법을 소개하는 건 당연하고, 그에 얽힌 일화에서 삶에 관한 성찰까지 시인의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담아내어 그야말로 정갈하게 차려진 따뜻하고, 맛난 음식을 대접받는 듯한 기분을 줍니다.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 “음식을 내기 전 깨소금을 뿌리거나 지단 등의 고명을 올리는 것은 접시를 받는 이에게 ‘당신이 처음’임을 알리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런 구절에선,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상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위로를 전하는 시인의 마음이 와닿습니다.

    “슬픔에 빠져 주위가 암담할 때 당근을 생각한다. 자신이 화려한 색을 지닌 것도 모른 채 땅속에 잠겨 있는 형광빛의 근채류 식물···이해하기 어려운 이 세계의 비애 속에서 주홍 단검을 손에 쥐고 드리워진 우울을 가르며 가야지. 당근이 깊이를 알 수 없이 두려운 땅속에서도 은밀하게 자신의 빛을 지키는 것처럼.”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음식 에세이임을 보여주는 대목은 〈주홍 단검을 들고 어둠을 헤치며〉란 글의 일부입니다.

    이 책은 뭐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얼굴을 지닌 것이 미덕입니다. 레시피를 소개하는 실용서 성격도 띱니다. 아귀의 간을 이용한 찜 요리인 ‘안키모’를 다룬 글이 그런 예입니다. 손질한 간을 찬물에 두 시간, 우유에 두 시간, 청주나 맛술에 두 시간, 소금물에 두 시간 도합 여덟 시간 담가두는 준비를 포함해 최소 여덟 시간 사십오 분 걸리는 요리법을 알려주니까요. 이 뿐인가요? 이를 뜨거울 때 썰면 간의 특성상 쉽게 부서지기에 열두 시간 정도 냉장고에서 차게 굳힌 뒤에야 겨우 먹을 수 있는 ‘바다의 푸아그라’라고 하네요.

    그러면서도 “시간을 다 살아내고서야 겨우 만들어지는 것들이 있다”로 시작해서 “사랑의 어쩔 수 없음은 그렇게 온다. 최상의 것을 해주고 싶으나 차선밖에는 주지 못할 때, 더 주지 못함을 미안해하는 애달픔에 세상의 모든 맛이 깃든다”로 끝나는 이 글 〈사랑은 안키모 같네요〉는 책에 실린 28편의 글 중에 가장 마음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아, 물론 최소한 일주일 길게는 열흘 이상 공을 들여야 제대로 만들 수 있다는 디저트 ‘마롱글라세’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너무 요리법 소개에 치중해서 개인적으로는 당기지 않더군요.

    이 책은 ‘일상과 세계 그 사이에서 빛나는 이야기들’을 묶는 ‘에세이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사계절에 맞춰 글들을 갈래지었으니 ‘봄 편’에서 달래 이야기가 빠질 리 없습니다. 달래장, 달래간장이며 은근히 자기주장이 센 달래의 향을 살리기 위해 곶감의 속으로 단맛을 내야 좋다는 달래 육회에 관한 레시피를 읽노라면 입안에 군침이 감도는 것이 ‘영락없는 요리책’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름 편’의 복숭아를 다룬 글에선 시인의 감수성이 돋보입니다. 늦여름 시장에 가서는 “다치거나 멍든 과일들을 따로 모아둔 떨이 과일 바구니”에 눈길이 가는 지은이는 “뭉개지며 순해지고 썩어가는 끝물. 이건 서서히 젖어가다 달게 무너지는 자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발목의 복숭아뼈를 떠올리며 “언젠가 우리도 떨어져 멍든 복숭아였던 적이 있겠지”란 구절에선 어째 웃음이 나오긴 했습니다.

    잘 차려진 상차림 같은 이 책은 참합니다. 다양한 얼굴을 지닌 글 내용도 그렇고, 책 곳곳에 깃든 예쁜 사진들도 그런 느낌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연녹색 바탕에 토마토 일러스트를 아래 배치한 뒤 자그마한 흰 글자로 된 책 제목이 수줍은 듯 박힌 표지,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에 200쪽 남짓한 두께의 책은 공들인 액세서리 같습니다. 들고 나가 따스한 봄볕이 부서지는 벤치에 앉아 영롱한 문장에 담긴 새콤달콤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를 권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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