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시네마] 빵과 장미
상태바
[월요 시네마] 빵과 장미
  •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6.29 11: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영국의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2000년 작)’는 미국 CBS TV에서 방영한 리얼리티프로그램 ‘언더커버 보스’의 모티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방송에선 9명의 회사 CEO들을 섭외하고 청소부로 분장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를 회사 소유의 빌딩에 환경미화원으로 위장취업(?)시킨다. 소위 허드렛일로 취급되는 블루칼라의 과중한 업무와 부당한 대우를 경험하게 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관찰프로그램인 만큼, 적어도 초기엔 웃음과 함께 잔잔한 감동을 남겼던 방송콘텐츠였다. 

언더커버 보스는 '빵과 장미'의 인상적인 한 장면에서부터 출발한다. 엘리베이터 바닥 문틈에 낀 먼지를 제거하는 일을 하는 미화원들에게 한마디 양해도 없이 비집고 들어가는 회사원들을 묘사한 신이다. 사람들의 행동에 불쾌해하는 주인공 마야(미화원 중 한명)에게 동료는 “저들은 우리를 투명하게 취급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연유한 개념이 ‘투명인간’이다. 

리얼리티관찰프로그램에 출연한 회사의 보스들은 분장한 자신을 사람들이 투명한 존재로 여기는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랐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방송프로그램에서 성찰을 이끈 영화는 얼핏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듯했다. 

사실 사회 저변에서 묵묵히 제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투명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그들의 존엄성을 무시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취급을 받는 것에 분노해야 하며 나아가 응징을 가해야 한다는 모티브에서 출발한 영화가 바로 '조커'다. 2019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한데,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으로 쓰레기 대란이 벌어진 상태라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조커' 역시 '빵과 장미'의 연장선에서 설명되는 측면이 있다.

 

'빵과 장미' 영화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빵과 장미' 영화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여하튼 '빵과 장미'는 인문·사회학적인 측면에서부터 다양한 장르 전반에 걸쳐 영감을 준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장한 분위기의 영화를 기대하면 곤란할 것 같다. 오히려 가벼운 코미디를 차용한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재단할 수 없는 무게가 있는 드라마다. 

간략하게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어렵사리 멕시코국경을 넘어 미국에 건너온 주인공 마야는 당찬 아가씨다. 밀입국브로커들이 자신을 유린하려고 할 때 도리어 그들을 골탕 먹이는 배짱도 있다. 친언니 로사를 찾아 그녀의 집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한다. 언니를 따라 빌딩 청소원 일을 하며 발랄하게 생활을 꾸려가는 ‘똑순이’형 캐릭터다. 

그러다 우연히 노동조합결성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샘과 조우한다. 샘은 빌딩 청소를 하는 미화원들이 빌딩소유자에게 직접 고용된 것이 아니고 엔젤 클리닝 컴퍼니라는 회사에 소속됐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또 미화원들이 노동착취를 당한다는 현실을 인식시키고 그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샘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마야는 그를 도와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회사로부터 정식고용과 의료보험 가입 등을 약속받게 된다. 고용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대학에 진학하려는 동료에 등록금을 마련해 주고자 벌인 절도행위가 발각되어 추방된다. 영화의 끝은 국경에서 그녀를 배웅하는 회사 동료들과 이별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다. 노동조합 결성을 도모하는 일로 한껏 각성됐던 마야가 진공청소기를 들고 청소를 하다가 창가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신이다. 이 신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거울쇼트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야의 모습에서 우선 그녀의 각성 상태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야는 창가에 다가간다. 그녀의 시점쇼트로 잡힌 장면은 창문너머 다른 건물에서 청소를 하던 여성과 눈을 마주치게 된다. 

이로써 이 장면은 중층의 요소로 해석될 수 있게 확장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사실 자신이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눈에 비친 형상과 닮아있다. 화려해 보이는 화이트칼라들은 자신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듯 행동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은 타인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실체를 가지고 있는 실존적 존재임이 분명해진다. 

이어서 그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은 건너편 건물의 한 여성과 오버랩된다. 다시 말해서 그녀와 내가 일치하는 지점과의 조우다. 나와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지각하는 일은 그녀와의 연대를 위한 인식의 선행 작업이랄 수 있다. 

 

'빵과 장미'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빵과 장미'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이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자기 동일시의 1차 나르시시즘과 타인의 눈이라는 거울을 통해 사회화된 모습의 자기애인 2차 나르시시즘과 만나는 지점이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로의 회기에 대해 ‘불쾌를 반복하는 데서 기인한 우울’로 진단했다. 하지만 타인 눈에 비친 실존을 확인하고 더 이상 투명한 존재가 아님을 눈으로 확인한 마야는 사회적으로 기표를 획득한 존재가 된다. 또 이제 스스로 혹은 창문 너머에 있는 그녀와 함께 기의를 채우면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어차피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을 밖에는 시스템에서 인정받는 길을 택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바로 연대다.

그러나 그 길이란 것이 녹록지 않다. 마야의 언니 로사는 노동조합결성에 앞장선 이들을 고발한다. 당뇨로 쓰러진 남편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선 그나마 지금 하고있는 미화원 일에서 미끄러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언니의 배신에 분노한 마야가 그녀에게 따져 묻지만, 그녀는 불편한 진실을 말한다. 마야를 취업시키기 위해 청소용역관리자와 잠을 자야 했으며, 그나마 지금 하는 일 전에는 몸을 팔아 멕시코의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마야의 분노가 무색하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가만히 톺아보면, 영화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노사 간 갈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보다는 노-노 간 연대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담담히 그리고 있다. 활동가 샘이 무심코 흘리고 간 메모를 입수한 용역관리자는 미화원 중 오래된 이들을 회유해 주동자가 누구인지 불 것을 강요한다.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은 가차 없이 해고된다. 

다른 한편, 이제 한 달 치 월급만 받아 등록금을 내면 법과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주어지는 회사 동료(마야를 흠모하는 캐릭터)는 파업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그런 그를 비난하던 마야지만, 정작 그가 돈을 마련하기 어려워지게 되자 충동적으로 어느 상점에서 돈을 훔쳐 등록금을 대신 내준다.

일찍이 20세기 맑스주의 사상가 루이 알튀세르는 이러한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촘촘한 그물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했다. 이를 통해 호명된 이들은 움쩍달싹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 시스템의 노예가 되거나 퇴출된다. 퇴출은 시스템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동력이 된다. 로사는 자신이 퇴출되지 않기 위해 동료를 팔아야 했고, 마야는 동료의 딱한 사정을 도와주려다가 범법자가 돼 퇴출될 처지에 놓인다. 

구조적인 노노갈등은 시스템을 운영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장치다. 오랜 기간 이와 같은 장치는 일종의 기술로 자리 잡아 왔다. 얼핏 '빵과 장미'가 노사 문제를 낭만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느냐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각본의 문제는 노사의 문제보다 노노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배치함으로써 연대의 어려움을 드러내려 했다. 

복직에 성공한 동료들은 마야를 배웅하는 로사를 부르지만 그녀는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마야의 선의가 어떻든지 간에 그녀는 죄를 어긴 이유로 미국으로부터 추방된다. 영화가 결코 희극적이지 아닌 지점인데,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생각한다. 노동쟁의의 결과가 관철됐기 때문인데, 이것은 오독이랄 수 있다. 

영화는 희극적인 결말 속에 노노갈등의 인자들을 드러내고 구조적으로 누군가 소외받을 수 없는 지점을 건들고 있다. 숱한 사회학적 논문들이 ‘정체성의 정치’와 ‘연대의 정치’에서 어느 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둬야 하는가를 고민하지만 이 역시 일종의 프레임이다. 진짜 비리와 범죄엔 눈감으면서도, 거짓으로 꾸민 공정과 정의의 문제를 이슈화시켜 뉴스거리를 생산하는 이들이 언론에 포진해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노노갈등에 부채질을 하는 추동세력이 누구인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사실에 더욱 언짢아진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