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의산성 복원과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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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의산성 복원과 춘천

    [기록과 증언으로 보는 춘천이야기]

    • 입력 2024.05.23 00:00
    • 수정 2024.05.25 23:48
    • 기자명 허준구 강원문화예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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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준구 강원문화예술연구소장
    허준구 강원문화예술연구소장

    “몽골군은 춘주성(봉의산 봉의산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2중으로 목책(木柵)을 세웠으며, 한 길이 넘는 구덩이(濠)를 파 놓고 여러 날 공격하였다. 성안에는 우물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찔러 피를 마셨으며 병졸들은 매우 피곤하였다. 이때 벼슬이 문학이던 조효립은 성(城)이 지켜지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안찰사 박천기는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먼저 성안의 전곡을 불살라 버리고 결사대를 이끌고 목책을 무너뜨려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구덩이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한 사람도 탈출한 자가 없었다. 끝내 성이 도륙되었다.”  - 「고려사절요」 ‘고종 40년 9월 조’ 中

    「동국여지승람」에 봉의산성에 대해 둘레가 2463척(1284m), 높이가 10척(3m)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봉의산성은 1991년부터 4년 동안 복원 공사를 했으나 기존 잔존 부분을 합쳐 남쪽 성곽 150m만을 복원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2004년 대대적인 봉의산성 유적 발굴 조사가 있었지만, 봉의산성 복원계획은 현재 전무 상태다. 봉의산 사적지 지정을 통한 역사 문화 공원화 계획은 예산 확보 문제로 차일피일 미뤄졌다.

    1983년 춘천시는 소양제를 부활시키며 봉의산성이 바라다보이는 부지에 봉의산순의비를 세웠다. 봉의산순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은 이 고장과 영고(榮枯)를 함께한 우리들의 표상으로 그 갈피 마다에는 역사의 자취가 서려 있다.

    고려 고종(高宗) 40년(1253)에 몽고군이 춘천에 침입했을 때는 이 고장의 관민이 봉의산성에서 몽고군(현재 몽고군은 몽골군이 표준어)과 대치(對峙)해 줄기찬 항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세(勢)가 적에게 미치지 못한 데다가 식수(食水)마저 끊겨 우마(牛馬)의 피로 해갈(解渴)을 하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의기로 굽힐 줄 모르는 항거(抗拒)를 했다. 힘이 다하여 산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참전하였던 관민이 함께 이 산성에 피를 뿌리고 전사했다. 끝까지 생존했던 관민은 적에게 굴하여 욕되게 사느니보다 깨끗이 대의(大義)에 순하겠다 가족과 함께 자결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 봉의산성이다. 

     

    역사적 의미를 갖는 봉의산성이 일부만 복원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사진=춘천시)
    역사적 의미를 갖는 봉의산성이 일부만 복원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사진=춘천시)

    나라를 지키려다 뿌린 선열의 숭고한 피가 스며 있는 산성은 허물어진 채 오늘까지 그 잔영(殘影)이 전하고 있으나 대의에 순한 이름 모를 수많은 선열의 절의(節義)는 세월 속에 잊혀 가고 있기에 여기 이분들의 고혼(孤魂)을 달래고 그 충절을 길이 후세에 기리려고 이 비를 세운다. -‘봉의산순의비’ 전문. 1983년 6월 2일. 최승순 지음.

    몽골군의 침입은 고종 18년(1231년) 시작되어 고종 46년(1259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7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전투로 인한 그 피해는 양적 질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그 가운데 봉의산성 대몽 항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춘천 박씨의 중시조인 박항(朴恒, 1227~1281년)은 개경에 있다 내려와 보니 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고 부모로 의심되는 시신만 300여 명을 찾아 장사 지냈다는 기록( 「고려사」 ‘열전19’ 박항전)에 따르면 봉의산성에서 순의(殉義)한 춘천 군관민(軍官民)의 수는 수천에 이르렀을 것이다. 춘천 군관민의 의를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정신은 이후 고려와 몽골과의 화친에 바탕이 됨으로써 고려인의 희생을 막기에 이르렀다.

     

    춘천 고등보통학교 상록회는 일제강점기 봉의산 정상에서 비밀결사의 회합을 가졌다. (사진=춘천고등학교 100년사)
    춘천 고등보통학교 상록회는 일제강점기 봉의산 정상에서 비밀결사의 회합을 가졌다. (사진=춘천고등학교 100년사)

    이러한 봉의산성에서 이루어졌던 군관민의 순의(殉義) 정신은 조선말 1895년 춘천 을미의병의 거의(擧義)를 알리는 소천제(所天祭)로 이어져 봉의산 정상에서 거행됐다.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춘천 고등보통학교 상록회가 비밀결사의 회합을 위해 봉의산 정상을 택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춘천 3일간의 방어 시에는 봉의산에 지휘 본부를 두어 전쟁의 대전환은 물론 대한민국 수호에 결정적인 역할로 이어지게 한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봉의산이다.

    봉의산이 분단 시대에 평화의 상징으로 통일 한국으로 나아가는 가장 앞자리에 있음이 바로 봉의산성에서의 군관민의 순의 정신에 있으며, 춘천인의 기저 정신으로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 허준구 필진 소개
    -전 춘천학연구소장
    -강원도 지명위원회 위원
    -춘천시 교육도시위원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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