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의 자연에서 얻은 영감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유병훈 추상화가가 춘천에서 4년만에 개인전을 연다.
이상원미술관은 11월 20일까지 유병훈 개인전 ‘숲. 바람-묵(默) The Forest. The Wind-Silence’를 개최한다. 미술관이 올해 마련한 세 번째 기획전이다.
이번 기획전은 미술관 2개 층에 나눠 40여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높이만 4m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크기(500호)의 대작을 비롯해 직사각형 캔버스 외에도 원형, 막대형 캔버스와 교자상 모양의 비정형 작품 등 다양한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색상이 단순해 미니멀한 추상작품으로 보이지만, 작품을 뒤덮은 색상은 작은 점들로 이뤄져 있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연’이다. 작가는 자연의 외향을 그대로 옮기기 보다는 생동하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느낌을 표현하는 모습이다.
작품은 하나의 ‘점’에서 출발한다. 이 점은 ‘존재’ 자체에 대한 상징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 크기와 색의 미세한 차이가 있는 점들은 캔버스에 자리잡으며 빛의 산란과도 같은 표면을 만들어낸다.
작가의 초기 작품은 아크릴 물감을 손가락에 묻혀 찍는 방식으로 농도 변화 없이 작품을 구성했다. 이후 농담의 변화를 주면서 붓을 사용하는 방식이 작품이 등장했고, 이번 전시에서는 두 가지 방식의 작품을 모두 볼 수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점들의 집합체는 흡사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의 진리를 구하는 수행의 여정이 담겼다.
그의 작품이 오랜시간 자연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 까닭은 그를 만들어낸 터전에 있다. 그는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중, 춘천고를 거쳐 홍익대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군 입대 직전 춘천 한일은행 별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강원대 미술대학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쓰며 춘천에서 작품세계를 이어왔다. 대규모 작품을 한번에 선보이는 춘천 개인전은 첫 개인전 이후 처음이다.
나고 자란 강원의 자연이 곧 작품세계가 됐다는 그는 독자적이고 단단한 미학적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작가 특유의 예민하고 서정적인 감수성에 포용적인 마인드가 더해져 틀과 형식을 파괴한 작품들을 완성했다.
자연의 외향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자연과 그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듯 하다. 그는 수십 여년간 자연을 화폭에 옮겨왔지만 여전히 자연을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유 작가는 “나에게 자연은 일상 모든 것의 기준으로 자연 그대로이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자연을 해부하지 않고도 작업으로 이어지는 풍경과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풍경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그럼에도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큰 왜곡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렵고 벼랑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작가는 전시를 위해 70여점의 작품을 가져왔지만, 공간 구성과 작품 감상 흐름에 따라 40여점만 내걸었다. 압도되는 인상과 상대적으로 친근한 느낌 등 공간이 갖고 있는 분위기마다 색다른 감상을 전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공간은 핫 핑크 색깔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방이다. 이 공간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이지만 색이 동일한 작품이 걸린 유일한 공간이다.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공간으로 작품 관람을 위한 벤치를 놓아 관람객이 잠시 쉬어가도록 했다.
이어서 마주하는 공간은 먹 드로잉 작품들만 모은 공간이다. 자연을 향한 깊은 고뇌가 또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작품들이다. 이곳 작품들은 여러 겹의 종이를 포를 뜨듯 잘라내는 등의 방식으로도 표현했는데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표현한 듯한 인상을 전한다.
신혜영 이상원미술관 학예실장은 “유병훈 작가의 예술적 성취를 그가 평생의 삶을 보낸 춘천에서 본격적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전시”라며 “작가의 예술 활동이 춘천과 나아가 한국 근현대 미술의 위상을 한층 진일보시키는데 기여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승미 기자 singme@mstoday.co.kr]
[확인=김성권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