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하면서도 다른 남한과 북한의 추석 문화,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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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슷하면서도 다른 남한과 북한의 추석 문화, 어떻게 다를까?

    추석보다 김일성 생일이 더 큰 명절
    민족 대이동과 같은 귀성 문화 없어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 추모하기도
    윷놀이, 연날리기 등 전통 놀이는 비슷

    • 입력 2023.09.30 00:01
    • 수정 2023.10.02 15:41
    • 기자명 이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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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민(탈북민)들에게 추석 연휴는 1년 가운데 흩어진 혈육이 가장 그리워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추석은 김일성 생일(4월 15일)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취급을 받지만, 한국에서는 온 가족이 모이는 최대 명절이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 춘천에는 2023년 현재 약 200명의 탈북민이 정착해 있다.

    지난 22일 강원북부하나센터에서 탈북민들을 위한 합동차례상을 마련했다. (사진=이종혁 기자)
    지난 22일 강원북부하나센터에서 탈북민들을 위한 합동차례상을 마련했다. (사진=이종혁 기자)

    탈북민 이미주(가명·37)씨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18살이 되던 2004년 탈북을 결심했다. 이후 5년이 지나 스물 세살이던 2009년 한국에 넘어와 춘천에서 살고 있다. 이씨는 올 추석 연휴를 앞두고 강원북부하나센터에서 다른 탈북민들과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는 “그동안 북한과 다른 한국 문화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여러 사람 덕에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이씨를 만나 한국과 다른 북한 주민들의 추석 문화에 대해 들어 봤다.

    Q. 남한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내려오게 되었나요?

    “북한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이 잘 사는 나라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탈북을 결심한 건 북한 당국이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데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어요. 나라에 돈이 없다면서 기부를 받았는데, 반동분자로 낙인찍혔던 집안이 단돈 20만원을 나라에 내고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더라고요. 18살이 되던 2004년 탈북해서 중국에서 5년을 지내다가 남한으로 넘어와 정착하게 됐어요.”

    Q. 춘천에 정착하게된 이유가 있나요?

    “탈북했을 당시 저와 함께 남한 적응 교육을 받던 탈북민이 505명이었을 거예요. 교육이 끝나면 본인이 원하는 지역을 선택해서 정착할 수 있는데, 저를 포함해 3명이 춘천을 선택했어요. 서울과 가깝기도 하고 당시에 경춘선이 개통되면서 서울로 출퇴근 하기 쉽겠다 생각했죠. 서울은 워낙 집값이 비쌌거든요. 나중에 알고보니 춘천에는 일자리가 부족해서 탈북민들이 선호하는 지역은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한 탈북민이 합동차례상 앞에서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이종혁 기자)
    한 탈북민이 합동차례상 앞에서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이종혁 기자)

    Q. 남한과 북한의 추석 문화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북한에서 최대 명절은 추석이 아니에요. 태양절이라고 해서 김일성 생일을 기념하는 날로 4월 15일이 가장 큰 명절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추석은 음력 8월 15일 당일 하루만 휴무일로 지정돼 있어요. 남한은 추석 당일 전후로 3일을 쉬는 것과 차이가 있죠.

    그렇다 보니 추석에도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에 방문해 추모하는 경우도 있어요. 금수산태양궁전에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주민들은 지역마다 설치된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을 찾아 참배하기도 합니다.

    또, 북한에서는 민족 대이동이라고 할만한 이동이 없어요. 남한은 명절이면 고향 방문을 위해 도로가 마비될 정도로 이동이 많지만, 북한은 교통이 불편해 먼 거리를 이동하기가 어려워요. 북한 주민이 주거지를 떠나 고향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여행증이라는 것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래서 명절에 고향을 방문하는 귀성 문화가 거의 없는 편이에요.

    그 외에는 비슷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가까운 가족끼리는 집에 모여 차례를 지내기도 하고 성묘도 다녀요.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윷놀이, 연날리기, 팽이치기 같은 놀이도 같이 즐기는 거죠.”

    Q. 남한으로 내려온 후 명절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명절을 따로 챙겨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혼자 탈북해서 남한에 정착하다 보니 명절을 챙기지는 않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주위에는 탈북민들끼리 모여서 명절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요. 춘천 강원북부하나센터에서 매년 명절마다 탈북민들을 위한 행사가 있어요.”

    Q. 남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제도가 잘 갖춰져 있나요?

    “남한에 오면 도우미를 붙여줘요. 생활용품은 어디서 사고, 마트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 남한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도와줘요. 도우미와 함께 안전보호경찰이 5년 동안 보호해줍니다. 기간 연장을 원하면 더 연장할 수도 있어요. 지역마다 하나센터가 있어서 적응할 수 있는 제도는 잘 갖춰져 있는 것 같아요.”

    Q. 남한에 내려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리움이죠. 남한에 도착하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정착을 잘하지 못하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특히 명절이나 어버이날이 정말 힘들었어요. 가족을 보고 싶은 생각이 너무 커지니까요.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제가 남한에 정착한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지금도 중국에서 생활하는 줄 알고 있어요. 남한에 정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어서 남한에 내려온 이후 한 번도 연락하지 못했어요.

    하루는 어버이날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목사님이 핸드폰을 들어 부모님께 감사 문자를 보내라고 하셨어요. 그때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가슴이 답답하더라고요. 그 순간을 잊지 못해요.

    그리고 남한에서 사용하는 외래어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북한은 순수 조선말을 쓰는데 남한은 한자나 영어와 같은 외래어를 섞어서 쓰잖아요. 예를 들어 청국장을 처음 들었을 때 파란색 국이 있나? 생각했어요. 북한에서는 콩을 썩혀서 장을 끓이니까 ‘썩장’이라고 부르거든요. 같은 음식인데도 말이 다르니 적응하기가 어려웠죠.”

    Q. 남한에 내려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남한에 내려왔을 때 양어머니같이 챙겨준 분이 있어요. 한 번은 그분이 명절에 집으로 초대를 해줬어요. 같이 음식도 만들고 가족들과 앉아 나눠 먹었죠.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의 사랑을 받았어요. 남한에 내려와서 가장 힘들었을 때 버틸 힘이 돼주셨어요. 아직도 그 따뜻한 마음이 잊히지 않네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해요. 잡히면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가족들도 위험해질 수 있어서 면도칼과 쥐약을 챙겨요. 혹시나 걸렸을 때를 대비한 거죠. 그렇게 큰 결단을 내리고 탈북을 해서도 남한 생활 적응이 어려워 다시 올라가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주변에서 따뜻한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족의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잊게 됐고, 덕분에 잘 적응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죠. 남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이종혁 기자 ljhy0707@mstoday.co.kr]

    [확인=한상혁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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