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엄마를 낳아서 키워주고 싶어요”

2021-11-29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손으로 읽으면 좋을 소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잘 쓴 소설은 한 번 펼쳐 들면 놓을 수 없을 만큼 빨려들게 하는 흡인력이 있습니다. 책장을 휙휙 넘기게 한다 해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라 불리는 소설들이 많이 읽힙니다. 반면에 한 구절 한 구절 손으로 짚어가며 읽는 것이 마땅한 소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야 주인공의 마음의 결이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 그려지기 때문이죠.

『엄마』(우사미 린 지음, 미디어창비)는 바로 그런 소설입니다. 남편의 외도에 따른 이혼, 부모와의 불화 등으로 무너져가는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간절하고도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한데 이야기는 밋밋하고, 심오하거나 멋진 표현도 없다시피 합니다. 대신 꼭꼭 다져가며 읽노라면,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는 칡 같은 소설입니다.

이야기는 열아홉 살, 대입 재수생인 우사기-소설에서는 ‘우짱’이라는 말이 더 쓰입니다-가 동생 밋군에게 하는 독백 형식으로 펼쳐집니다. 우짱이 엄마의 큰 수술 하루 전날 참배 차 구마노 순례길로 떠난 여행담에 어릴 적 이야기, 엄마의 불행, SNS 활동 등이 버무려지며 찬찬히 우짱의 속내와 상황이 드러나죠.

우짱은 유치원 시절부터 장래 희망을 ‘엄마’라고 적었을 정도의 ‘엄마바라기’입니다. 엄마도 우짱과 동생 밋군을 ‘엄마의 엔조(천사)’라 부르며 지극히 사랑하죠. 이런 평화가 오래가지 않습니다. 우짱의 초등학생 시절 아빠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갑니다. 게다가 엄마는 함께 사는 외조모에게 맺힌 게 많습니다. “언니가 외로울까 봐 덤으로 너를 낳았다”고 했을 정도로 우짱의 큰이모를 편애했거든요. 어려서는 엄마(외할머니)에게 애정을 갈구하던 엄마, 사랑을 주리라 믿었던 남편에게 버림받은 엄마. 엄마는 자해를 하고, 술을 가까이하는 등 차츰 무너져 정신병원에 입원하기까지 이릅니다.

“엄마는 아빠가 바람피웠을 때 일을 자기 내면에서 수없이 반복해 덧그린 끝에 깊은 도랑을 만들고 말았고···상처가 생기면 그 상처를 몇 번이고 덧그려서 더욱 깊게 상처를 내고 말아, 혼자서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도랑을 만드는···.” 

곁에서 그런 엄마의 소리 없는 울음을 들으며 가엾어서 미칠 것 같지만, 엄마가 주는 상처를 견뎌야 하고, 학업에도 지장을 받은 우짱. 연민과 원망, 사랑과 미움이 오갈 수밖에요.

약을 대량으로 먹고서 토하거나 식칼을 벽에 찌르거나 하는 엄마를 보며 우짱은 생각합니다. 나잇값도 못하고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아기를 낳기 전에 헤어지지 않았는지, 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말하면서 죽지 않는지 말이죠.

그런가 하면 엄마와 아빠를 맺어준 건 자신이라는 자책도 합니다. “엄마를 되돌아가지 못하게끔 만든 것은 아빠도, 아빠 이전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전 남자친구들도 아니고 사실은 나입니다. 엄마를 이상하게 만든 것은 제일 먼저 태어난 딸인 나 우짱이었습니다.”

처절할 정도로 애증이 엇갈리는 관계에서 우짱은 “머지않아 쓰러져 하얀 병실에서 코에 튜브를 달고 눈물 자국을 말리면서 억지로 연명하는 엄마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느니 어린 시절에, 아직 엄마가 다정하고 엄격했던 시절에, 신이었던 그대로” 죽길 바랍니다. 이런 바람은 상처가 많은 엄마를 아름다웠던 그대로 지켜주고 싶어 “엄마를 낳아주고 싶어, 낳아서 처음부터 키워주고 싶어요”란 소망까지 다다릅니다. “그러면 분명히 구해줄 수 있습니다”란 이유에서죠.

이 소설은 엄마와 딸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그린 일종의 심리소설입니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그 사랑을 제대로 전달할 줄 모르는 사이, 사랑하는 존재가 괴로운 지금, 참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도망치고도 싶은 복잡다단한 마음을 포착해낸 소설입니다.

사실 일본 소설이어서 소개가 조금 망설여지긴 했습니다. 한데 ‘창비’란 출판사 이름에 끌렸습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여기서 고른 소설이라면···’하는 마음이 작용했습니다. 올 1월 신인 작가에게 주는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라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점에도 끌리긴 했지요.

어쨌든 잠깐의 고심 끝에 골랐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한 소설입니다. 우짱의 심정을 짚어가노라면, 부모 자식 간을 포함한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