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아득한 성자

2020-05-19     칼럼니스트

       아득한 성자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 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조오현:1968년『시조문학』등단.*전,조계종 대종사. 신흥사 조실.*시집:아득한 성자』 외.

이영춘 시인

인생의 무상함이란 이런 것인가? 5월 26일(음력 4월 12일)이면 설악무산 조오현 큰스님의 2주기가 돌아온다. 이 세상을 건너오시면서 그 많은 가르치심과 중생 구원의 가피(加被)를 남기셨건만 스님은 항상 낮은 자세였다. 자신을 벌레만도 못한 미물로 여기며 수도 정진하셨다. 돌아가실 때도 속세에서 유언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시, 임종게(臨終揭), 열반송(涅槃頌)을 큰 법어로 남기시고 가셨다.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 보니/온몸에 털이 나고/이마에 뿔이 돋는구나/억!” ‘온몸에 털이 나고 뿔이 돋는다’는 것은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했다는 자성의 목소리일 것이다. 어쩌면 도(道)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자성으로 자신을 한껏 낮추어 ‘짐승’에 비유한 말씀일 것이다. 열반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을 이렇게 비천한 자리에 내려놓고 가신 분이다. 이런 겸손이 수도자의 자세일까? 

 떠나시기 전에는 일생을 정리하듯 인제군민의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을 위해 장학금을 다 마련해 놓고 가셨다는 일, 백담사를 오르내려는 버스기사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식사 대접을 하셨다는 일, 손길 닿는 곳곳마다 다 챙기고 떠나셨다는 보도기사는 가슴 뭉클한 사연이었다. 
그리고 본인이 떠나시는 날까지 미리 점지하여 일체의 공양을 끊으셨다니 그 거룩한 성자의 정신 앞에 손과 마음과 두 무릎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라고 자신을 하루살이만도 못한 존재로 비유하여 한없이 낮추신다. 이런 자세가 수도자의 항심일까? 속인으로서는 그 선계(禪界)가 아득하고 멀기만 하여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은 성심(聖心)! 
눈 감고 앉아 묵상하듯 되돌아본다. 우리들은 각자 처한 신앙에서 혹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나를 구제하는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를 한 번쯤 깊은 성심으로 돌아볼 시(詩)인 것 같아 애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