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임인년과 춘천…270년 전 봉의산은 ‘호랑이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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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년기획] 임인년과 춘천…270년 전 봉의산은 ‘호랑이 놀이터’

    대룡산·봉의산 누벼···호랑이 몰아 사냥
    임인년에 중앙시장·춘천세종호텔 ‘탄생’ 

    • 입력 2021.12.30 00:02
    • 수정 2022.01.19 10:36
    • 기자명 윤수용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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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인년 춘천에 무슨 일이. (그래픽=박지영 기자)
    임인년 춘천에 무슨 일이. (그래픽=박지영 기자)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디론가 물려가 버릴듯한 호랑이굴 속 같은 요즘, 2022년 검은 호랑이의 해가 성큼 다가왔다. 인간을 해치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면서도, 산신과 무속신앙 속 호랑이, 특히 검은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오는 동물로 여겨졌다.

    춘천시의 공식 상징 동물이 호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호랑이는 만주를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 걸쳐 존재했고 춘천에도 이와 관련한 출몰 기록과 이야기가 있다.

    춘천에 전해오는 호랑이 이야기는 모두 대룡산·봉의산과 연관되어 있다. 봉의산은 대룡산 낙맥(落脈)이 소양강을 향해 달려오다가 그 기세를 멈추고 도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춘천의 진산이다. 여기에 호랑이가 춘천의 상징 동물이라는 점에서 호랑이는 춘천과 동반자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춘천의 상징 동물 호랑이의 이야기를 꺼내어 본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사진=본인제공)
    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사진=본인제공)

     

    ▶ 1. 봉의산에서 호랑이 사냥

    봉의산에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기록은 조선시대 영의정까지 올랐던 조재호(趙載浩)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재호는 1746년 12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춘천에 머물며 ‘문소각에서 호랑이 사냥을 구경하다(聞韶閣觀虎獵)’라는 시를 자신의 문집에 남겼다. 270여 년 전만 해도 봉의산에서 호랑이가 포효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차며 무리가 포위해 나가며               蹴雪群圍進​(축설군위진)
    ​숲을 뚫고 독을 묻힌 포수가 따른다.           穿林毒砲隨(천림독포수)
    산모퉁이 등지고 스스로 의지할 뿐​             負嵎徒自恃(부우도자시)
    ​굴을 떠났으니 마침내 어찌하랴?               離窟竟何爲(​리굴경하위)
    ​포효하던 씩씩함은 의지할 곳 없자             無賴咆哮壯(무뢰포효장) 
    좌우로 돌아보며 느릿느릿 움직일 뿐이네.    猶能顧眄遅(유능고면지)
    푸른 벼랑에서 끝내 피 뿌리니​                  蒼崖終灑血(​창애종쇄혈) 
    ​사람은 그 가죽에서 잠을 자게 되리라.       人擬寢其皮(인의침기피)

    시 제목에 언급한 문소각(1648년 건립)은 1890년 완공된 춘천이궁의 핵심 건물로 현 도청 의회 건물 일부와 도청사 서쪽 일부에 걸쳐 있었다.

    춘천이궁은 강원도청이 춘천에 들어설 수 있는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의 내용은 봉의산에 나타난 호랑이를 포획하는 장면이다.

    먼저 호랑이 몰이꾼이 눈을 차며 포위해 나가고, 독을 묻힌 쇠뇌(큰활)를 들고 포수가 숲을 가로질러 호랑이를 따라간다. 호랑이는 산모퉁이 구석에 몰리자 사납게 울부짖던 모습은 간데없고 좌우를 돌아보며 달아날 틈을 엿보며 느리게 움직이는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호랑이는 낭떠러지에서 최후를 맞고 그 가죽은 사람의 잠자리가 되고 말았으니, ‘호사유피(虎死留皮)’와 다름 아닌 호랑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 2. 효자를 등에 태운 호랑이

    춘천 효자동 유래는 효자 반희언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반희언에게는 늙으신 어머니가 계셨는데, 어머니는 산딸기를 좋아하셨다. 한겨울에 어머니가 산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반희언은 곧바로 대룡산으로 향했다. 산딸기를 찾았지만, 눈보라에 길을 잃고 헤매다 호랑이를 만났다.

    무슨 까닭인지 호랑이는 반희언을 등에 태워 집에 데려다 주었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에 기도했다.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대룡산에 가면 시신 세 구가 있으니 그 가운데 시신의 머리를 잘라 고아서 어머니께 드리라고 하였다. 산신령의 말대로 대룡산에 가니 시신 세 구가 있었다. 가운데 시신의 머리를 잘랐다. 다시 호랑이를 타고 집에 돌아와 머리를 고아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솥을 살펴보니 시신의 머리 대신 산삼이 들어 있었다. 이후 시신의 머리를 자른 대룡산을 찾아가니 그곳에 머리 잘린 산삼과 두 그루의 산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삼의 머리를 자른 곳을 거두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춘천 효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착한 사람을 돕는 민화 속 친근한 동반자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3. 임인년 춘천댐 건설로 춘천닭갈비 ‘탄생’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춘천 최초 막국수가게는 ‘방씨막국수’이다.

    이 가게는 1930년대 춘천초등학교를 다녔던 분들의 기억 지도에 처음 등장하며, 요선동 사창고개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춘천이 막국수의 고장이란 타이틀을 갖게 된 것과 ‘방씨막국수’ 가게를 연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통상 춘천막국수가 대중에게 알려지고 대중에게 사랑받는 음식으로 변모한 계기를 소양댐 건설 시점이라 말하고 있다. 반면 춘천닭갈비 탄생에 대해서는 그 설이 지금껏 분분하다. 

    그러나 1962년(임인년) 북한강 수계에 춘천댐 건설이 시작되자, 춘천댐 건설 노동자에게 새참으로 꿩고기 육수와 고명을 얹은 막국수와 지금 닭갈비의 원조가 되는 ‘닭불고기’를 내놓았던 사람이 있어 주목된다.

    춘천댐 건설이 1962년에 시작되었고 소양댐 건설은 1967년에 시작되었으니, 5년이나 빠르다.

    1962년 춘천댐 건설 현장 근처인 지암리에 임시 가게를 열고 건설 노동자에게 막국수와 닭 불고기를 제공한 주인공은 서민식(서울 춘천산골막국수) 대표의 할머니 임금례 씨다.

    서 대표의 할머니는 1960년대 중반 중앙초등학교 앞에 막국수가게(유달식당)를 내고 이곳에서 평생을 막국수와 닭불고기를 팔았다. 지금도 춘천 사람 중에는 1960년대 유달식당을 기억하고 기록(http://blog.daum.net/kwmolee/13504763)으로 남겨 놓기도 하였다.

    유달식당 외에도 1960년대에는 사창 고개 중턱의 실비막국수, 중앙시장에서 춘천고 방향으로 넘어가던 일명 미미기고개 중턱의 막국수집, 약사명동 모아엘가 아파트 부근에 자리했던 남부막국수가 있었다. 여기에 낙원동 가구 골목에 지금도 성행하고 있는 닭갈비집 역시 연원이 유달식당에 그리 뒤처져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춘천 막국수 확산 시점과 춘천닭갈비 유래 시점은 1960년대 초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허준구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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