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익의 교육만평] 이수광과 풍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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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익의 교육만평] 이수광과 풍극관

    • 입력 2023.02.21 00:00
    • 수정 2023.02.22 00:33
    • 기자명 책읽는춘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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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익 책읽는춘천 대표
    최광익 책읽는춘천 대표

    1597년 중국 연경에 사절로 갔던 「지봉유설」의 작가 이수광은 거기서 안남 사신 풍극관(馮克寬)을 만났다. 두 사람은 자금성 옆 외교 숙소인 옥화관(玉河館)에서 오십일 동안 함께 지내며 교류했다. 당시 이수광의 나이는 36세, 풍극관은 70세였다.  

    안남(安南)은 지금의 베트남이다. 당나라 태종은 중국 주변의 ‘오랑캐’들을 정복하고, 대개는 조공을 받고 자치에 맡겼다. 하지만 몇몇 말 안 듣는 지역은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직접 통치했는데, 옛 고구려 땅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현 베트남 지역의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등 6개 도호부를 두었다. 베트남의 옛 이름인 안남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했다.

    처음 두 사람은 중국어 통역을 통해 대화했다. 통역의 한계 때문인지 두 사람은 한자 필담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과 안남은 한자문화권 국가였기 때문에 이들 간 대화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필담은 이수광이 일방적으로 묻고 풍극관이 답변하는 일종의 인터뷰 형식이었다. 이수광의 주요 질문은 풍극관의 직위, 안남 땅의 크기, 안남의 관제와 풍속, 국가 인재 선발 방법, 벼가 두 번 익는다는 게 정말 가능한지, 얼음이나 눈이 없다는 게 사실인지, 일본과의 거리는 몇 리인지 등 16가지이며, 자세한 내용은 이수광의 「지봉집(芝峯集)」에 실려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친구가 된다. 이수광은 풍극관이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는 「만수경하시(萬壽慶賀詩)」라는 시집의 서문을 써 준다. 조선의 출중한 선비로부터 최상의 찬사를 받은 서문을 받았으니 풍극관은 귀국 후 이 시집을 널리 알렸을 것이다. 풍극관은 70살이 넘는 나이에 안남과 연경을 오가며 독서와 필사를 쉬지 않았고 귀국해서도 15년을 더 살며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으니 건강과 관운을 타고난 인물이 분명하다. 그는 중국 황제로부터 초상화를 선물 받을 정도로 중국 측에서도 인정받았으며, 그때 받은 그림은 현재 베트남 그의 고향 사당에 보관되어 있다.

    중국 황제에게 바친 풍극관 시집이 베트남 지식인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서문을 쓴 이수광도 자연스럽게 베트남에 이름이 알려진다. 말하자면, 베트남의 최초 한류 스타가 된 셈이다. 조완벽(趙完璧)은 진주 출신 선비로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가 일본 상인의 노예로 오키나와, 중국, 필리핀,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체를 체험한 이색적인 인물이다. 17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조완벽의 베트남 체험을 여러 기록으로 남겼는데, 기록에 따르면, 한문 실력이 뛰어난 조완벽은 일본 무역상의 일원으로 안남을 세 차례 방문할 수 있었다. 조완벽이 안남을 방문했을 때 안남에는 이수광의 시가 널리 읽혔고, 이수광과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베트남 관리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양국 사절 간 교류의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옥하관도 우리와 관계가 깊다. 이 건물은 1413년 조선 사신 최용소(崔龍蘇)가 건축 감독을 한 것으로 전해 진다. 그는 공사 감독 도중 쇠못에 왼쪽 눈을 상해 귀국했다. 명나라 영락제는 후에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화공에게 명하여 비단 두 폭에 초상화를 그려 친필로 제정공(齊貞公) 최용소의 상(像)이라 쓴 다음 하나는 편전에 걸고 한 벌은 본국 후손에게 보내주었다. 황제가 보낸 초상화에도 왼쪽 눈이 없다고 전해지는데, 강화최씨 문중에 보관 중이던 이 그림은 도난 당해 현재는 복제품만 남아 있다. 한편 황제가 살던 자금성 건축을 베트남인 건축기술자 응우옌 안(Nguyen An, 1381-1453)이 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응우옌 안은 명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했을 때(1407-1427) 수많은 인재들과 함께 중국으로 끌려왔는데 72세로 사망할 때까지 자금성 등 유명 건축물을 감독했다.

    베트남의 학교 이름은 대개 역사적 위인들의 이름을 따서 사용한다. 하노이에 근무하는 동안 필자는 하노이 소재 고등학교 명단에서 2개의 ‘풍극관고등학교’를 발견했다. 그의 이름을 딴 학교가 하노이에만 두 곳이 있으니, 그만큼 풍극관이란 인물의 역사적 비중을 알 수 있다. 그 중 한 학교를 방문하여 필자가 근무했던 한국학교와 활발한 교류를 약속했으나 코로나와 필자의 임기 만료에 따른 귀국으로 중단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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