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익의 교육만평] 은유로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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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익의 교육만평] 은유로서의 죽음

    • 입력 2023.02.07 00:00
    • 수정 2023.02.07 14:58
    • 기자명 책읽는춘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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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익 책읽는춘천 대표
    최광익 책읽는춘천 대표

    요즘은 각종 소식을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주고받는다. 지인들의 중요한 애경사(哀慶事)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한 유명 인사의 부고를 인터넷에서 보았다 “○○○씨가 향년 ○○세의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익숙한 기사지만, ‘향년’ ‘일기’ ‘별세’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이며, 어떤 배경에서 그런 용어가 비롯됐는지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죽음은 삶의 끝맺음이니 사람이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그 예우와 격도 달라지겠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망자를 달래고 유족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다. ‘불귀(不歸)의 객(客)’ ‘극단적인 선택’ 등이 흔히 보는 표현이다.

    죽음을 나타내는 표현 중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종교에서 쓰는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소천(召天·하늘이 부름), 가톨릭은 선종(善終·임종 때에 성사를 받아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이라 하며, 불교에서는 열반(涅槃·승려가 죽음) 또는 입적(入寂·승려가 죽음), 정교회에서는 안식(安息·편히 쉼)이라 부른다. 이러한 말을 깊이 분석해 보면 각각의 종교 교리가 죽음을 표현하는 말속에 잘 나타나 있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순교’ ‘순국’ ‘순직’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글자 그대로, ‘순(殉)’은 희생이란 의미로, 순교(殉敎)는 종교를 위해서, 순국(殉國)은 나라를 위해서, 순직(殉職)은 직무를 수행하다 희생했다는 뜻이다. 옥쇄(玉碎)라는 말도 있는데, 직역하면 ‘옥처럼 부서진다’는 뜻이다.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을 이르는 말이지만, 일제가 태평양전쟁 때 가미가제와 같은 자살돌격 행위를 ‘천황을 위한 옥쇄’ 운운하며 미화한 적이 있어, 우리 기억에 그 쓰임은 부정적인 의미로 남아 있는 말이다.

    흔히 쓰는 별세(別世)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남’이라는 의미이고, 타계(他界)는 ‘인간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로 간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 특히 귀인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영면(永眠)은 ‘영원히 잠들다’는 뜻으로, 죽음을 잠에 비유한 표현이다. 운명(殞命)은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이라는 뜻으로, 가끔 ‘운명을 달리했다’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운명했다’고 해야 맞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은 ‘유명(幽明)’이란 말과 혼동한 데서 비롯된 듯하다. 유명은 ‘저승과 이승’이란 뜻인데, 이 말이야말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표현해야 올바른 사용법이다. 요절(夭折)은 ‘젊은 나이에 죽음’이라는 뜻이다. 역사책에서 자주 보는 붕어(崩御)는 임금이 세상을 떠남, 승하(昇遐)는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말한다.

    향년(享年)은 ‘한평생 살아 누린 나이’, 일기(一期)는 ‘한평생 살아 있는 동안’, 명복(冥福)은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 고인(故人)은 ‘죽은 사람’이란 말이다. 향년은 ‘누린 나이’라는 말속에 비교적 오래 살았던 의미가 포함돼 있어 일찍 죽은 사람에게 쓰면 어색한 표현이다. 발인(發靷)은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장의차에 실어 장례식장부터 장지(葬地)까지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인(靷)’은 수레바퀴(車)를 괴었던 굄목을 뜻한다. 굄목을 뺀다는 의미니 곧 장례가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영어권에서도 죽음을 나타내는 은유적인 표현이 많다. ‘편안히 쉬다(Rest in peace)’ ‘하늘나라에 가다(Go to heaven)’ ‘돌아가시다(Pass away)’ ‘더 좋은 곳으로 가다(Go to better place)’ ‘떠나다(left)’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표현이고, ‘먼지를 뒤집어 쓰다(Bite the Dust)’ ‘양동이를 차다(Kick the bucket)’ 등의 표현은 죽음을 저속하게 표현한 것이니 공식적으로 사용할 말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현재 어떤 상태에서 삶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부정적이고, 어둡고, 피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죽음이 없는 세상은 과연 좋을까.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포르투갈의 작가 사마라구는 「죽음의 둥지」라는 소설을 통해 죽음이 사라진 세상을 알려준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무도 죽지 않는다. 늙고, 불치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죽는 사람은 없다. 죽지 않으니, 양로원, 연금, 보험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천당과 지옥을 이야기하던 종교는 제 기능을 잃는다. 병원, 장의사, 묘지업 등 죽음을 기반으로 했던 비즈니스가 모두 멈춘다. 처음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환호하던 사람들은 점차 죽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으로 가득한 현실이 새로운 지옥임을 깨닫는다. 마침내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단 한 사람도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 인간은 죽음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죽음에 이런저런 은유를 써 왔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중에서 이제는 후자들에 관심을 가질 시기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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