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선의 예감] 2022년,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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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선의 예감] 2022년,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보내며

    • 입력 2022.12.30 00:00
    • 수정 2022.12.30 20:46
    • 기자명 용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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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선 춘천지혜의숲 시니어아카데미 부원장
    용호선 춘천지혜의숲 시니어아카데미 부원장

    또 한 해가 지는 녘이다.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았으랴만, 2022년도 희망과 회한이 무수히 교차한다. 그 번민을 대변하니 교수신문이 가려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다. ‘과이불개(過而不改)’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말이다. ‘과이불개 시위과의(是謂過矣)’라고 적혀 있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라고 해석한다. 

    국가적으로나 지역사회로서나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통해 저마다의 희비를 짊어졌다. 춘천도 마찬가지다. 두 차례 중차대한 선거의 여파는 도청사 이전 부지 재결정을 낳았다. 그에 따른 봉의동 현 청사 지대 재활용 방안도 제시됐다. ‘역사·문화·관광 복합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방안 중 하나가 도립미술관 설치다. 해묵은 과제다.

    2000년대 중반 도는 도립미술관건립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유치 희망 시군에 대한 타당성 조사 보고까지 받고도 강원도가 발을 뺀 이후 어언 20년 가까이 감감무소식이었던 화두다. 강원특별자치도 출범, 도청사 이전 계획에 따른 현 청사 부지 재활용 방안에 도립미술관 설립이 부각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문제는 미술문화에 대한 지역사회의 미비한 인식이다. 2007년 ‘강원도립미술관 건립 기본구상 및 타당성 조사용역 최종보고회’에서 BTL(민간자본유치사업)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방안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됐음에도 도는 손을 놓았다. 도립미술관 유치 희망 시군 간의 과열 경쟁을 구실로 내세웠다. 이후 지역 미술계에서 간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으나 또한 부질없는 경우에 지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은 자치단체의 공공미술관 설립 의지다. 세파에 속절없이 흩날리는 탓이다. 올해, 2022년은 춘천에서 성장한 조각가 권진규 탄생 100주년이다. 그러나 춘천에서는 철저히 무시됐다. 아무런 행사, 사업이 보이지 않았다. 지방선거를 비롯한 갖가지 곡절을 겪으며 문화특별시를 표방했었고,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받은 민선 7기 춘천시의 권진규미술관 건립 의지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불세출의 조각가 권진규 탄생 100주년은 그 어떤 기약도 없이 저물고 있다. 축구 월드컵 대회에서 활약한 선수를 치켜세우며 ‘고향이 춘천’이라고 떠벌렸던 경우에 비춰보면 답답한 노릇이다. 권진규에 관한 어휘는 숙연하게까지 한다. ‘비운의 천재 조각가’는 예사다. ‘불멸의 조각가’라고 칭하는가 하면 그의 묘(망우역사문화공원)를 품고 있는 서울 중랑구에서는 ‘한국 현대조각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주지하고 있다시피 그는 춘천고교(옛 춘천공립중학교) 출신이다.

    타계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그가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며 미술관 건립을 희망하자 전국 지자체들이 앞다퉈 유치전에 뛰어들어 건립지로서의 타당성을 제시한 이유는 남사스럽기까지 했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선대의 출생지, 삼성전자 사업장(공장) 소재지, 민족예술의 발상지, 심지어는 “고인이 생전에 즐겨 찾았던 고장”이라고까지 들먹였다. 한 미술평론가는 “다들 말 같지도 않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권진규의 춘천 연고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화적 자산’이라는 말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다. 매년 수억원씩의 예산을 투입하는 춘천조각심포지엄을 창설할 당시 내세운 맥락적 인물이 권진규다. 예술적 명성은 예산 투입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유학하며 고대 그리스 조각→로댕→브르델→시미즈 다카시로 이어지는 인류조각사의 맥을 이은 인물이 권진규다. 지난 2009년 개교 80주년을 맞은 무사시노미술대학이 학교의 역사를 빛낸, 예술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를 선정했는데 바로 권진규였다. 동서양 미적 감성, 미의식, 미학을 넘나들며 한국조각의 독자성을 확보했다는 평이다. 이런 예술적 성취를 외면한 처사를 어떻게 설명할 텐가.

    지역사회 일각에서는 춘천에 존재했던 사설 ‘권진규미술관’이 간판을 내리고, 유족이 일부 작품 및 자료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것을 운운하며 ‘권진규’를 금기어로 취급하다시피 했다. 그런 실정이어서 스스로 삶을 거둔 생애가 그랬듯 단 한 번인 탄생 100주년도 춘천에서는 불행했다.

    내년, 2023년은 권진규 작고 50주기다. 때맞춰 남서울미술관에 설치되는 그의 작품 상설전시관이 문을 연다는 소식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권진규미술관’이라는 명칭은 표류하고 있다. 춘천시와 지역사회가 함께 ‘권진규미술관’을 되찾아 오는 지혜를 발휘할 일이다. 

    권진규는 타계 1년 전인 1972년 3월 3일자 조선일보 기고문 ‘예술적 산보-爐室(노실)의 天使(천사)를 作業(작업)하며 읊는 봄, 봄’에서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자세를 이렇게 언급했다. 

    “절지여도 포절하리다. 포절 끝에 고사하리다. ⋯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爐室)에 화장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悔改昇華)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나는 어루만진다. ⋯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칠(乾漆)을 되풀이하면서 오늘도 나는 봄을 기다린다, 까막까치가 꿈의 청조(靑鳥)를 닮아 하늘로 날아보겠다는 것이다.”

    탄생 100주년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지만, 작고 50주년의 봄에는 권진규미술관의 싹이 다시 피어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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