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익의 교육만평]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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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익의 교육만평]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

    • 입력 2022.11.29 00:00
    • 수정 2022.11.29 15:04
    • 기자명 책읽는춘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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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익 책읽는춘천 대표
    최광익 책읽는춘천 대표

    세계에서 3억6000만명 이상이 영어로 말하고, 그 밖의 사람들도 영어로 말하려고 온갖 애를 쓴다. 하지만 애쓴 결과가 항상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영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성장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특이하게도 이 산업은 생산 라인, 애프터서비스, 배송이 필요 없다. 영어 구사 능력 하나로 쉽게 직업을 구하고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영어를 배우기 위해 평생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키피디아(2007)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6900여개의 언어가 있다. 이 중 모국어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는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힌두어, 아랍어 순이다. 하지만 모국어 사용자와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합한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은 ‘브로큰 잉글리시(Broken English)’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19세기 전까지 영어는 하나의 변방 언어에 불과했다. 현재의 영국 땅은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의 통치, 기독교의 전래, 바이킹의 영향,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프랑스의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한 후 지배층은 프랑스어를, 백성은 영어를 쓰는 체제가 굳어졌다. 프랑스의 영국 정복 이후 300년이 지나도록 영국 왕 가운데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399년 헨리 4세에 이르러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치자가 처음 나왔다. 비교적 최근인 18세기에도 영국에는 독일 출신 왕인 조지 1세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극해 영어라고는 한마디도 못했는데도 13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영어의 세계화는 19세기 이르러 영국 제국주의 및 산업혁명의 확산으로 시작됐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에 걸맞게 영국의 식민지는 너무 넓어 해외 영토 중 하나 이상이 언제나 낮이었다. 한때 대영제국(British Empire) 깃발 아래 인류 거주지의 4분의 1(3670만㎢, 한반도의 약 180배)과 세계인구의 4분의 1(4억6000만명)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영향으로 ‘코먼웰스 게임(Commonwealth Games)’으로 알려진 4년마다 개최되는 영연방 국가 체육대회에는 아직도 전 세계에서 74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여기에 20세기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틀어쥐면서 영어의 지위는 더 확고해졌다. 유학생, 미군, 평화봉사단, 라디오 방송을 주축으로 1990년대 영어를 기초로 개발된 인터넷이 세계로 퍼지면서 영어는 세계의 표준이 됐다.

    일상생활, 국제회의, 학문, 예술, 스포츠를 망라해 영어가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영어 구사 능력은 우리나라에서도 입학, 취업, 승진뿐 아니라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중요 수단이 됐다. 이는 마치 중세 성직자들이 라틴어를, 조선 사대부가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통해 지배력을 유지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또 세계화 시대를 맞아 무역, 이민, 여행, 유학 등 인적 교류가 확대되면서 영어를 배울 필요가 가중됐다.

    ‘대한민국은 영어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영어 교육의 열기가 뜨겁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학교에서의 영어 교육은 차치하더라도 영어유치원, 영어마을, 영어학원, 학습지, 각종 콘텐츠, 원어민 영어, 공인 영어시험 등 영어 사교육 규모는 약 5조원대에 이른다.

    하지만 투자와 노력에 비해 성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2021년 미국 ETS 분석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토플(TOEFL) 성적 평균은 86점(120점 만점)으로 세계 81위, 아시아 12위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지만, 아직도 ‘원어민에게 배워야 한다’ ‘가능한 빨리 배워야 한다’ ‘영어는 영어로 배워야 한다’ ‘미국영어·영국영어가 정통이다’ 등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이 난무하며 도처에서 영어학습을 격려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도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해 남는 것은 스트레스뿐인 영어. 과연 영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제 영어가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수단이 아닌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도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위대한 황제 샤를마뉴(Charlemagne)는 “두 개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두 개의 영혼을 갖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역사, 문화가 포함돼 있다. 우리가 영어를 잘 못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글자와 발음에 한정해서 더 큰 정신세계를 못 본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제 인공지능(AI) 발전으로 통역이 자유자재로 이뤄진다면 외국어 구사력이 보장했던 특권도 사라질 것이다. 현재 한·일 기계 번역은 92%, 한·영 번역률은 70~80%에 도달했다. 전문가들은 번역률 85%가 넘으면 사용자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한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 우리나라 자동 번역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정부의 근시안적 연구개발 지원 정책, 전문 인력 부족에 따른 기술 개발의 어려움, 자동 번역 서비스는 공짜라는 소비자들의 그릇된 인식 등이 지적됐다. 정부의 투자와 우리의 인식이 개선 된다면 영어 스트레스가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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