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 로컬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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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포, 로컬의 자존심

    • 입력 2022.08.18 00:01
    • 수정 2022.11.09 14:17
    • 기자명 권소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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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는 노포는 지역 상권의 색깔을 만들며 앵커스토어의 역할을 한다. (그래픽=MS투데이 DB)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는 노포는 지역 상권의 색깔을 만들며 앵커스토어의 역할을 한다. (그래픽=MS투데이 DB)

    얼마 전 서울 인사동 ‘명신당필방’에서 낙관(落款, 글씨나 그림에 이름과 호를 쓰고 찍는 도장)을 팠다. 명신당은 지필묵을 비롯한 각종 서예용품을 판매하는 필방으로 특히 전각(篆刻, 나무·돌 등에 인장을 새기는 것)이 유명하다.

    컴퓨터 인쇄가 당연해진 시대, 손으로 직접 돌에 도장을 새기는 김명 명신당필방 대표는 시아버지에게서 가게를 물려받았다. 김 대표의 딸도 기술을 익히며 일을 돕는다. 시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필방에서부터 역사를 찾자면 1932년부터 4대째 존속돼온 장인의 노포(老鋪)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미국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이 명신당을 찾아 도장을 새겼다. 명신당이 한국 전통문화와 장인정신을 체험할 수 있는 ‘인사동’이라는 공간을 대표하는 가게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 상권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것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 가게들이다. 한 업종의 가게가 존속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지역 소비층이 탄탄하고 상권이 건강하다는 증거다. 경영을 유지하기 위한 소상공인들의 꾸준한 노력과 상품 경쟁력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번 여름휴가에 튀김소보로가 유명한 대전 ‘성심당’(1956년 개업)을 찾았다. 원도심을 지탱하는 대표적인 로컬 빵집 성심당은 올해 5월 성심당문화원을 개관하는 등 앵커스토어(상권의 핵심이 되는 유명 점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제조과정에서 나온 폐유로 만든 생분해 주방 비누 ‘튀소비누’, 향토 기업이자 국내 최초 문구회사인 동아연필과 합작해 만든 ‘흑심×빵심 연필’ 등 지역성을 담은 상품을 로컬 브랜드 가치에 덧입혀 판매한다.

    사랑받았던 로컬 업체들과 이별한 춘천시민에게 ‘성심당’은 참 부러운 사례다. 1979년 개업해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결혼식장 디아펠리즈(구 ‘행복예식장’)와 1993년부터 운영했던 자수정사우나가 올 들어 폐업하면서 상실감도 컸기 때문이다. 결혼식장과 목욕탕, 모두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가 컸던 업종이다.

    어려운 지역 경기와 발빠르게 변하는 소비 트렌드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춘천의 노포들이 존재한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지정하는 ‘백년가게’를 보면 춘천 로컬 상권의 특색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중기부는 창업한 지 30년 이상 된 경쟁력 있는 소상공인과 소기업을 발굴해 100년 이상 존속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백년가게’를 지정해 지원하고 있다. 춘천에는 15곳의 백년가게가 운영 중이다.

    △춘천명물닭갈비 △통나무집닭갈비 등 닭갈비 전문점이 2곳, △실비막국수 △명가막국수 △원조남부막국수 △샘밭막국수 △메바우명가춘천막국수 △오수물막국수 등 막국수 가게가 6곳으로 지역 대표 먹거리 식당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전통 있는 지역 빵집인 대원당, 캠프페이지에서 미군 부대 주방을 총괄했던 외할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은 수제버거 전문점 라모스, 민물 매운탕 전문인 도지골등나무집, 공지천의 터줏대감인 원두커피 전문점 이디오피아집 등도 백년가게로 이름을 올렸다.

    춘천에서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이 가게들도 브랜드 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다. 샘밭막국수는 최근 세븐일레븐 편의점과 ‘백년가게 샘밭막국수’ 간편식을 출시했다. 춘천의 맛을 그대로 구현한 메밀면과 비법 소스를 전국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샘밭막국수는 이미 서울에 2곳, 경기 성남과 고양에도 지점을 운영하는 등 춘천 로컬의 힘을 뽐내고 있다.

    지난해 11월 30년 이상 역사를 지닌 장인의 가게들이 서울 강남역에 팝업스토어를 마련했다. 서울시가 오래된 로컬 가게의 가치와 관광객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연결하기 위해 준비한 홍보 공간이다. 명신당필방도 참여해 MZ세대와 교감했다. ‘전통’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고 도전하려는 시도다.

    “젊은 손님들은 먹는 행위 자체보다는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다. 맛은 기본이고, 우리가 가진 전통과 감성에 매력을 느낀다.” 춘천의 한 백년가게 대표와 했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전통과 혁신의 공존 속에서, 수십 년 지역 상권을 지켜온 이 노포들을 내일도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권소담 기자 ksodamk@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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