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익의 교육만평] 사신(使臣)과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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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익의 교육만평] 사신(使臣)과 외교관

    • 입력 2022.08.09 00:00
    • 수정 2022.08.09 09:47
    • 기자명 책읽는춘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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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익 책읽는춘천 대표
    최광익 책읽는춘천 대표

    글로벌 시대 외국과의 관계가 국민의 삶의 질을 좌우하고 있다.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리는 외교가 중요해지는 이유다. 2022년 현재 우리나라는 191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며, 116개국에 대사관, 46개 도시에 (총)영사관, 5개 도시 및 기관에 대표부를 두고 있다.

    외교관은 외국에 살며 자국을 대표해 외교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이다. 대사 이하 외교사절은 모두 면책특권을 가지며 상대국의 사법 관할에서 면제된다. 외국에 살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기에 청소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직업이다. 한편으로 외교관은 위험천만한 직업이기도 하다. 해당국과 전쟁이 일어나면 죽거나 볼모로 잡히기도 하고, 갈등이 심할 때는 비례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이기도 하다. 서양의 한 외교관의 말처럼, 결국 ‘낡은 가방과 늙은 아내만 남는 직업’일 수도 있다.

    옛날 외교는 주로 사신(使臣) 제도를 활용했다. 사신은 “임금이나 국가의 명령을 받고 외국에 사절로 가는 신하”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일본, 여진, 몽골이 우리나라의 주요 사신 파견 국가였다. 그중 중국과의 사신 교환은 조선시대만 1000회가 넘는다.

    조선이 중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 사신단은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을 포함해 역관(통역사), 의관(의사), 화원(화가), 군관(경호원) 등 평균 40여명으로 구성됐다. 공물을 가지고 가는데 필요한 마부, 짐꾼을 포함하면 보통 300~400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한양을 출발해 돌아오기까지는 평균 5~6개월이 걸렸으며, 조선 특산물인 인삼, 호피, 수달피, 화문석, 한지, 모시, 명주, 금 등이 공물로 인기가 있었다.

    사신단에는 평균 10여명 내외의 역관이 동행했다. 조선시대 역관은 사역원(司譯院)에서 양성했다. 중국어, 몽골어, 여진어, 일본어 역관이 되기 위해서는 3년에 한 번 시행하는 잡과에 합격해야 했다. 사역원에서는 요즘의 ‘English Only Zone’처럼, 해당국 언어만 사용토록 했으며, 3년 안에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쫓아내 군대에 입대시켰다고 한다. 역관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부자도 당시 장안의 제일 부자였던 역관 변승업을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은 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절과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임시 사절로 나누어진다. 정기 사신은 하정사(賀正使, 신년하례 사절), 성절사(聖節使, 황제·황후 생일 축하사절), 동지사(冬至使, 동지를 전후해 보내는 사절), 천추사(千秋使, 황제·황후·황태자 생일 축하사절)가 있었다. 임시 사절은 사은사(謝恩使, 베푼 은혜에 감사하는 사절), 주청사(奏請使,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 진하사(進賀使, 중국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 보내던 사절), 진위사(進慰使, 황실에 상사가 있을 때 보내는 조문 사절) 등이 있었다.

    사신은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가지고 갔기에, 얼핏 사신을 보내는 것이 큰 손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반대인 경우도 많았다. 중국에서는 작은 나라에 비싼 사례품을 많이 내려주어 큰 나라의 위엄을 보이고자 했기에 조공(朝貢, 바치는 물건)보다 사여(賜與, 조공에 대한 답례품)가 더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명나라는 조선에 3년에 한 번(三年一貢)을 요구했지만, 조선에서는 1년에 세 번(一年三貢)을 주장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사신은 새로운 서적, 기기, 곡식 등을 가져오기도 하고 새로운 종교나 사상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려 말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붓대 속에 목화씨를 몰래 들여왔고, 18세기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은 고구마를 들여와 백성들의 허기진 삶을 개선했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실의> 등 천주교 서적, 자명종, 화포, 총, 안경 등 새로운 기기가 들어와 조선 백성의 삶을 변화시켰다. 사신단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외국에서 온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거나 경험했던 일화를 다양한 종류의 글로 남겨 외국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은 북경에서 안남(베트남) 사신 풍극관을 만나 교류한 사실을 글로 남겼고,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일종의 여행기로 청나라의 다양한 풍물을 소개했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이제 세계는 ‘지구촌(global village)’이 되었다. 여권만 있으면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는 191개국에 이른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이 넘쳐난다. 이제는 외국을 방문하는 모두가 외교관인 시대가 됐다. 민간외교, 공공외교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외국 여행에 앞서 우리나라의 좋은 이미지를 알릴 방안을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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