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부채 하나로 버틴다”⋯ 춘천 ‘돼지골‘의 여름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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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포] “부채 하나로 버틴다”⋯ 춘천 ‘돼지골‘의 여름지옥

    80대 이상 노인 5세대 포함 총 12세대 거주
    역대급 무더위와 폭우에 힘겨운 여름나기
    도시가스 미공급에 ‘겨울 오면 더 걱정‘

    • 입력 2022.07.21 00:02
    • 수정 2022.07.22 00:02
    • 기자명 서충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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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춘천은 낮 최고기온 32도를 기록했다. 돼지골에 50년째 거주 중인 박씨는 선풍기가 고장이 나 부채 하나로 무더운 올여름을 버티고 있다. (사진=서충식 기자)
    19일 춘천은 낮 최고기온 32도를 기록했다. 돼지골에 50년째 거주 중인 박씨는 선풍기가 고장이 나 부채 하나로 무더운 올여름을 버티고 있다. (사진=서충식 기자)

    “덜 더운 날은 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부채질하면 조금 시원해지긴 해요. 올해처럼 너무 덥거나 비가 자주 오면 이겨낼 재간이 없고요. 에어컨이요?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춘천지역 판자촌 ‘돼지골’에서 1970년부터 살았던 박모(86)씨는 추운 겨울보다 무더위와 장마가 반복되는 여름이 더 무섭다. 겨울에는 보일러로 버틸 수 있지만, 여름에는 높은 습도와 열기를 식힐 방법이 마땅치 않다. 작년까지만 해도 선풍기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고장이 나 부채 하나로 여름을 버티고 있다. 19일 오후 박씨 집 주변에는 비에 쓸려온 쓰레기가 널려 있고, 고온다습한 날씨 탓에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한림대학교와 후평동 세경아파트 사이에 있는 ‘돼지골’은 춘천에 마지막 남은 판자촌이다. 과거에 이곳 주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돼지를 키우며 살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20여 세대가 거주했지만, 그 수가 많이 줄어 현재는 12세대만이 남아있다. 이 중 5세대는 80대 이상 노인이다. 본지는 19~20일 이틀에 걸쳐 돼지골을 다녀왔다.

    ▶“여름은 지옥이다”
    19일 춘천 낮 최고기온은 32도를 기록했다. 돼지골 초입까지 가는 길에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을 입구에서는 동물과 꽃이 그려진 벽화가 오는 이를 반기고 있었다. 5년 전 지역 봉사단체에서 그려준 벽화는 해를 거듭하며 색이 바래 생동감보다는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돼지골을 쏘다니는 기자가 수상했는지 주민 변모(62)씨가 “거⋯ 누구시오?”라며 말을 걸어왔다. 7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 왔다는 변씨는 주거환경에 대해 묻자 “주거환경 개선 같은 건 다른 나라 이야기”라고 했다. 그는 “이곳에 사는 노인들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하루하루 버티면서 살고 있을 뿐“이라며 “주변에 대학교나 산업 단지들도 들어서는 걸 보면서 여기서 쫓겨나면 이번엔 어디로 가야하나는 생각만 든다“고 했다.

     

    올해 박씨 집에는 잦은 폭우 때문에 옆 산에서 흘러내린 토사와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가 떠내려왔다. (사진=서충식 기자)
    올해 박씨 집에는 잦은 폭우 때문에 옆 산에서 흘러내린 토사와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가 떠내려왔다. (사진=서충식 기자)

    50여년째 돼지골에서 거주 중인 박씨에게 올해 여름은 더욱 힘들다. 돼지골은 대학교, 아파트,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찜통 그 자체다. 박씨 집 지붕은 열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슬레이트로 만들어져 집 안은 공기는 밖보다 더 뜨거웠다. 올여름에는 장마 기간 산을 타고 내려오는 토사와 쓰레기들도 박씨를 괴롭혔다. 그는 “올해 비가 워낙 많이 내린 탓에 집으로 떠내려온 쓰레기들을 치우느라 건강이 더 나빠졌다”며 “그러면서도 매번 ‘별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20일 돼지골 초입에 사는 김모(81)씨를 만났다. 김씨 역시 “올해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덥고, 비도 많이 내려 유달리 힘든 여름을 나고 있다”고 했다. “옛날엔 추운 겨울만 어떻게든 버티면 됐었는데 요즘은 여름 나기도 만만치않게 힘들어지고 있어요.” 그는 이어 “대부분 이곳에 사람이 사는지도 모를 것“이라며 “우리가 잘 사는지 확인하고 밑반찬을 주러 오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는데, 올해는 이마저도 뜸하다“고 말했다.

    돼지골은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아 겨울철 난방은 LPG보일러나 나무를 떼는 화목(火木) 보일러를 이용한다. LPG는 도시가스보다 난방비가 비싸고, 화목보일러는 나무를 태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기가 인근 아파트까지 번져 민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벽화 인근 돼지골 초입 토지는 한림대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일송학원이 소유자다. 돼지골 주택들은 토지 소유자 허가가 없어 도시가스를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서충식 기자)
    벽화 인근 돼지골 초입 토지는 한림대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일송학원이 소유자다. 돼지골 주택들은 토지 소유자 허가가 없어 도시가스를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서충식 기자)

    주민들은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해 돼지골에 도시가스라도 보급되기를 바라지만 토지주 허가를 받기 어려워 쉽지 않다. 취재 결과 박씨가 사는 일대는 일송학원을 포함해 9명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고, 김씨가 사는 일대는 한림대학교와 한림대학교춘천성심병원 등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일송학원이 토지 소유자다. 돼지골 또 다른 토지도 경기도, 부산 등지에 거주하는 7명이 공동으로 소유 중이다. 변씨는 “수십 년째 땅 주인들이 돼지골 주민이 사는 걸 이해해주고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남의 땅에 공짜로 집 짓고 사는 건데, 도시가스까지 놓아주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충식 기자 seo90@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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