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콩 같은 농부가 되고 싶은 이의 귀농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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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의 뒤적뒤적] 콩 같은 농부가 되고 싶은 이의 귀농일기

    • 입력 2022.05.16 00:00
    • 수정 2022.05.16 11:05
    • 기자명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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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서울살이 30년이 된 마흔 중반의 남자. 죽자고 살고 있는데 사는 건 늘 고만고만하고, 내일의 더 넓은 아파트, 내일의 더 큰 차를 위해 오늘의 야근이 당연한 삶에 흔들립니다. 노를 젓기는 하는데 방향은 오리무중인 유원지 나룻배에 타고 있는 불안이 차오릅니다. 게다가 아토피를 앓는 아이는 자고 나면 피와 진물로 옷과 베개를 얼룩집니다.

    이 남자,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나 경북 봉화 고향으로 갑니다. “금의환향 전에는 택도 없다!”는 아버지의 반대, “출퇴근 자유로운 직장”이라는 회사 동료들의 부러움을 안은 채로요. 그러고는 농사짓기 3년여, 이번에는 책을 일궈냅니다. 짠한가 하면 우습고,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농촌살이’를 그려낸 귀농일기 『어쩌다 농부』(변우경 지음, 토트)는 그렇게 빛을 보았습니다.

    지은이 소개에서 대강 짐작들 했겠지만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재미입니다. 귀농 첫해 고추 농사를 지으려 고추씨를 사는 이야기에는 자지러집니다. 대권선언, 아크다, 카사노바, 마니따⋯. 종묘상에 품은 빛바랜 포스터가 호소하는 아크로바틱한 고추 품종 이름들입니다. 종묘상이 “고추는 뭐니뭐니해도⋯”라 권하는 ‘남자의 자격’이란 품종도 나옵니다. 가을에 고추씨를 받아 이듬해 심어도 싹이 안 나는 ‘1세대용’ 주제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게 맘에 안 들어 지은이는 사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저 먹고 살자고 고추의 대를 끊냐”고 농간을 부린 종자회사를 원망하면서요.

    짠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설 아래 대목이라 발 달린 이들은 모두 나온 오일장. 모시고 나온 어머니가 제사상에 올릴 문어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놓습니다. 이걸 보던 지은이가 호기를 부립니다. 한데 ‘그깟 문어 얼마 한다고 내 사드림세’ 하려고 보니 쌀 한 가마 값, ‘아부지도 좋아하시는데 왜 안 사고’ 하려다 보니 고추 열 근을 팔아야 하는 걸 알고는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어물전 앞에서 망설이는 아들을 보고 오마니가 한마디 하십니다. “하기사 이가 없어 먹도 못한다.”

    그러니 농촌 현실에 대한 농투사니의 비명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해마다 속는 게 농사여도 그렇지. 아무리 풍년이라 값이 없고 흉년이라 팔 게 없는 농사여도 그렇지. 사과원 열 마지기, 밭 스무 마지기 농사에 트럭 할부금도 못 넣는 게 말이 되냐고! 새벽마다 이슬로 사우나하며 일했는데 날품팔이보다 못한 농사를 굳이 애써 지을 까닭이 뭐냐고!” 이런 한탄 섞인 분노가 그런 경우죠.

    귀향 3년이 지나니 지은이는 영락없는 농부가 됩니다. 어느 순간 들판 가득 술렁술렁 번져가는 봄기운을 느끼고는 “빚쟁이처럼 봄이 온다”고 합니다. ‘아직 과원에 전지도 못 끝냈는데 고추 싹이 올라왔네. 사과도 다 못 팔았는데 주석 형님네는 벌써 거름을 받았네’ 하며 잠 못 드는 채무자처럼 뒤척이죠.

    ‘거름이 곧 맛이다’란 믿음에 간편한 비료를 두고 해마다 쿠릿하고도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닭똥과 소똥으로 거름을 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은이에 따르면 비료로 키운 작물은 허우대만 멀쩡하고 지갑은 텅 빈 뺀질이처럼 크고 번듯하지만 맛은 맹탕이라네요. 거름으로 키워야 감자는 감자다운 맛이, 사과는 사과다운 맛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공짜는 없고 농사는 지나치게 정직하더라”면서 구린내로 목욕을 하더라도 거름을 내는 우직함을 보입니다.

    그래도 책의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은 지은이의 속 깊은 마음 덕입니다. 사과농사를 짓는 지은이는 과원의 늙은 사과나무를 베어내는 것도 일이랍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콩을 심는 답니다. 사과나무를 캐고 그 자리에 바로 나무를 심으면 대부분 죽거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답니다. 전에 있던 나무의 뿌리가 썩으면서 내뿜는 독기 탓이기에 이를 치유해주는 마법 같은 작물이 콩이랍니다. 그러면서 지은이가 소망합니다. “콩 같은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주변에서 “퇴직하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짓지 뭐” 하는 이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런 허상을 깨뜨리며 농사가 절대 만만하지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책들은 이미 여럿 나왔죠. 이 책은 그런 것을 넘어 삶의 지혜와 재미를 전해줍니다. “오늘 이곳의 삶이 중요하다”는 깨우침과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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