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흑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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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흑매론

    • 입력 2022.04.27 00:00
    • 수정 2022.04.27 12:10
    • 기자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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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黑梅論(흑매론)

                                       문 효 치

    각황전 앞 흑매가 왔다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엔 붉기만 한데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흑매라 한다
    오호라, 색깔이 진하면 黑이라 하는구나
    한동안 잊었던 흑장미도 생각난다

    평생을 일구어 쓴 내 시
    깜냥에 피워낸 꽃이라 생각했는데
    그 꽃의 濃淡은 어디쯤 이르렀을까
    맹물이 얼마나 섞여 있을까

    잉크에 물을 찍어 글을 쓴다며 文士들을 꾸중한
    괴테를 생각하며
    고개 떨구고 화엄사를 내려온다

    *문효치: 1966년 『서울신문』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무열왕의 나무새」 「백제 시집」 외 다수. 한국펜클럽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시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각성의 시다. 이승훈의 ‘현대시 작법’에 보면 “시집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마치 그것이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시인지망생들이 많은데⋯”라는 구절이 있다. 많이 읽기도 해야겠지만 남의 시를 읽으면서 거기에서 어떤 사상을 배우기도 하고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시는 인간을 가르치는 덕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경’의 덕목도 그런 배움과 인격수양을 우선시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배워왔다. 필자도 이 시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시를 되돌아보면서 많이 느끼고 많이 자책했다.

    어느 지면에선가 썼듯이 “내 시가 고작 아픈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하고 더 슬프게 하는 시만 썼던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문 같은 글을 썼던 적도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의 한(恨)스러운 신변잡기만 쓰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다. 산문에서 에세이와 미셀러니를 구분하듯이 시에도 교훈성과 철학성을 띤 어떤 진리가 담긴 시가 무게 중심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요즘 난무하는 ‘낯설게 하기’란 포장 아래 현란하게 읊조리는 난해시, 현대시가 무조건 좋은 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시의 배경은 전남 구례군 마산면에 있는 ‘화엄사각황전’이다. 이 사찰은 문화재 지정 국보 67호로 1702년에 중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절에는 나한전과 원통전 사이에 위치한 홍매가 꽃잎이 붉고 진하며 ‘각황전’에 대비되어 보이는 꽃잎도 검은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여 ‘흑매화’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 시의 화자는 이곳 사찰에서 ‘흑매화’를 통하여 자신의 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진술하고 있다. “평생을 일구어 쓴 내 시/깜냥에 피워낸 꽃이라 생각했는데/그 꽃의 濃淡(농담)은 어디쯤 이르렀을까/맹물이 얼마나 섞여 있을까”라며 독백하듯 자성한다. 
     
    문득 ‘독필(禿筆)’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독필의 사전적 의미는 끝이 닳아서 없어진 붓이란 뜻으로 자신이 쓴 문장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추사 김정희는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글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고 한다. “열 개의 벼루를 갈아 바닥을 내고 천 개의 붓을 닳도록 썼다(摩穿十硏禿筆盡千毫). 그러나 그토록 써 왔어도 편지 글씨 하나도 못 익혔다(未嘗一習簡札法)”라고 자탄했다는 일화다. 대가들의 이런 자성의 글을 보면서 참 많이 배우고 참 많이 부끄럽고, 시(詩)의 길이 참으로 멀고 아득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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