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가(校歌), 누구를 위해 부르는가?
  • 스크롤 이동 상태바

    교가(校歌), 누구를 위해 부르는가?

    ■윤수용 콘텐츠 2국장

    • 입력 2022.03.09 00:01
    • 수정 2022.11.09 14:49
    • 기자명 윤수용 국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삽화=박지영 기자)
    (삽화=박지영 기자)

    “아~에~이~오~우~”

    새 학기를 맞아 학교 밖 담장 넘어 들려오는 음악수업 ‘발성 연습’이다. 이 발성 연습은 유치원생부터 초·중·고등학생은 물론 앵커와 아나운서도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최근에는 얼굴 주변 팔자 주름 예방과 입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정보광장의 추천으로 중장년층도 애용 중이다. 참으로 쓰임새가 많다.

    우선 기성세대들은 하얀색 실내화를 신고 박자에 맞춰 교실 나무 바닥을 구르던 추억을 소환할 것이다. 국민(초등)학교 음악수업 시간으로 불리는 유년시절이다. 교가는 음악 선생님의 낡은 풍금 소리에 맞춰 재잘거리던 발성법으로 목을 풀고 처음으로 배운 노래다. 이 노래는 학창시절 교정, 졸업 후 사회에서 자부심으로 부르는 애창곡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애창곡인 교가가 최근 교육 현장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논란의 중심은 강원도교육청이 올해 초 춘천의 한 학교 교가 가사의 한 음절이 ‘성차별적 가사를 포함’하고 있다며, 수정하라는 권고에서 시작했다. 교육 당국은 이 학교 교가 2절에 나오는 ‘아들, 딸’이라는 표현을 성차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적은 정식 공문을 통해 학교에 전달됐다.

    공문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아들, 딸의 사회적 지위는 가정 내에 위치돼 있으며, 사회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사회에는 아들과 딸 사이의 다름이 차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만큼 아들, 딸이라고 불리는 순간 아들 또는 딸의 역할로 각각 제한되는 이미지화가 된다"는 것이다. 공문을 다시 요약하면 ‘아들, 딸’을 ‘우리들’로 수정하라는 것이 골자다.

    도 교육청은 지난해 학교 교가·교훈 속 성차별적 요소 개선을 위한 '우리 학교 교가·교훈 돌아보기'를 추진했다. 단 학교별 교가·교훈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파악하고 전문가 검토를 거친 뒤, 운영위원회·학부모회·학생자치회 등 교육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자율 수정 과정 등을 거치라는 나름대로 ‘출구전략’도 내놨다.

    이런 행보에 대해 학부모와 시민단체는 곧바로 교육 당국의 시대착오적 행정을 규탄하며 단체행동에 나섰다. 교가 가사 수정 권고는 편향된 젠더와 페미니즘 사상을 도 교육청이 나서서 강요하고 있는 만큼 이는 왜곡된 성차별 갈등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반교육적 행태란 주장이다.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교가 가사 수정이 조손·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본 궤도를 이탈한 옹색한 변명이다.

    MS투데이는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1월 11일부터 18일까지 “교가 속 ‘아들, 딸 표현이 성차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란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설문조사 결과, ’공감도 낮은 과도한 수정, 반대한다‘가 압도적(86.6%)으로 많았다. 반대 의견인 ’성차별 해소, 수정 찬성한다‘는 13.4%에 그쳤다. 이 학교는 학부모 투표 등을 통해 교가 가사 변경 추진에 나섰지만, 현재 표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교육 당국은 ’우리 학교 교가·교훈 돌아보기‘ 프로젝트의 올해 추가 추진 계획은 불투명하다고 알려왔다. 프로젝트가 단발성이란 합리적인 의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논란의 출발점은 젠더(gender)이다. 젠더는 생물학적인 성(sex)에 대비되는 사회적인 성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이번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젠더 갈등에 편승한 ‘표 구걸’을 목격했다. 그러나 구조적 성차별은 이분법적 문제로 회귀하고 있다. 젠더 문제만큼은 승자가 없고 모두 패자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젠더를 악용해 언어 유희를 즐기는 이들의 먹잇감으로의 전락이다. 또 신자유주의 무한도전과 각자도생이 교육 현장에서 담론화된 것이다.

    이런 꼬인 실타래는 이성은 물론 동성 간,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집단에서 보고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폭력으로까지 진화한다는 점이다. 폭력은 권력 관계에서 발생한다. 미국 극작가 데이비드 매멧의 희곡인 2인극 ‘올리아나’(Oleanna)는 이런 상황을 젠더와 권력, 강요 등을 소재로 갈등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남성 교수는 학점 문제로 면담을 요청한 또 다른 주인공 여대생을 전문용어와 성차별적 표현으로 공격한다. 여대생은 이런 스승의 방식을 습득해 반격에 나선다. 씁쓸한 ‘청출어람’이다. 희곡은 젠더 관점에서의 교수와 여대생, 권력 관계의 스승과 제자 모두 피해자로 남는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막을 내린다.

    학교 현장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인 유토피아(Utopia)를 꿈꾸는 가장 합리적인 공간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간에서 왜곡된 젠더와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변이된 바이러스가 경고를 보내고 있다. 교가 가사 수정으로 점철된 갈등구조는 모든 구성원이 공론화해 투명하고 공정하게 토론을 거쳐 궤도를 수정하면 된다. 일방통행식 의사결정은 위험하다. 물론 성 편향적인 표현과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는 교가는 다시 돌아보기가 필요하다. 전제는 자율수정이다.

    지난 3월 8일은 유엔이 1977년 공식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우리나라는 반세기가 지난 2018년 ‘여성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파워(권력)를 장착한 젠더는 위험하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양성평등의 기반을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언어와 메시지는 모방을 거쳐 또 다른 신호를 양산한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말이다.

    필자는 “누구를 위해 교가는 불리는가”란 물음을 정중하게 던지고 싶다.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저작권자 © MS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