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과제들] 하. 죽기 좋은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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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다잉 과제들] 하. 죽기 좋은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

    웰다잉 시대에는 인간 존엄성과 자기 결정권 우선시해야
    죽음준비교육 중요성 확대 “죽음 금기시하는 문화 바꿔야”
    웰다잉 선진 도시 도약 “법적 근거·전문가 양성 기관 필요”

    • 입력 2021.12.27 00:02
    • 수정 2022.01.04 11:44
    • 기자명 조아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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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의 결승선은 출발선이다. 결승선과 출발선이 맞닿아 있듯 죽음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는 ‘죽음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고 믿게 하지만 과연 죽음 앞에 우리는 정말 평등한가? 죽음으로 생(生)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죽음의 질 지수’가 가장 높은 영국은 ‘익숙한 환경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좋은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죽음의 질 지수’가 가장 높은 영국은 ‘익숙한 환경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좋은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영화 ‘신세계’의 명대사다. 죽기 좋은 ‘날씨’가 있을까. 날씨는 모르겠지만 죽기 좋은 ‘나라’는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개발한 ‘죽음의 질 지수’는 죽음을 앞두고 방문할 수 있는 병원의 수, 치료수준, 임종과 관련한 국가 지원, 의료진 수 등 20가지 지표로 ‘죽기 좋은 나라’를 평가한다. 한국은 40개국 중 2010년 32위, 2015년 18위를 기록했다.

    순위는 나아졌지만 죽음의 질 지수가 가장 높은, 즉 ‘죽기 좋은 나라’ 영국과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제도에서 여전히 큰 차이를 보인다.

    영국은 2008년 좋은 삶을 누릴 권리처럼 좋은 죽음도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임을 선언했다. 영국에서는 ‘익숙한 환경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좋은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웰빙을 넘어 웰다잉의 시대로

     

    전국과 춘천의 고령인구 비율 비교. (그래픽=박지영 기자)
    전국과 춘천의 고령인구 비율 비교. (그래픽=박지영 기자)

    한때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웰빙(Well-Being)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다.

    이와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되는 웰다잉(Well-Dying)은 품위가 있는 죽음을 전제로 삶의 내면을 풍요롭게 가꿔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존엄한 죽음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2017년부터 고령사회가 됐다. 올해 기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16.6%로 치솟았다. 춘천은 더 심각하다. 지난달 기준 18.6%를 기록하며 초고령사회(고령인구 20% 이상)로의 진입을 눈앞에 뒀다.

    고령화 시대에 발맞춰 웰빙을 넘어 웰다잉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이뤄져야 하지만 여전히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향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건수는 지난 8월 100만건을 넘어섰고, 이달 21일 기준 114만4726건까지 늘었다. 또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서 65세 이상 노인 중 89%가 좋은 죽음을 위해 스스로 삶을 정리한 후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처럼 이미 많은 이들이 죽음에 대한 존엄과 자기 결정이 존중받길 원하고 있다.

    ▶“질병 아닌 고통 치료 원해”··· 춘천, 웰다잉 인프라 미비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기관인 강원대학교병원은 입원형과 가정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강원대학교병원 대외협력팀)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기관인 강원대학교병원은 입원형과 가정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강원대학교병원 대외협력팀)

    노인 10명 중 9명은 신체·정신적 고통 없는 임종이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웰다잉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질병 치료보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 개선에 초점을 둔 ‘완화의료’, 말기 암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까지도 포괄적으로 돕는 ‘호스피스 제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현재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기관은 108곳(입원형 서비스 97곳, 자문형 서비스 33곳, 가정형 서비스 39곳, 총 169곳 중 2개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중복 제외)으로 강원도는 단 2곳(1.85%)에 불과하다. 병상 수, 의료진 수 등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강원도 호스피스·완화의료 현황. (그래픽=박지영 기자)
    강원도 호스피스·완화의료 현황. (그래픽=박지영 기자)

    특히 춘천은 법적 근거도 마련하지 못했다. 강원도 18개 시군 중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웰다잉 문화조성에 관한 조례’는 강릉시, 동해시, 삼척시, 원주시, 인제군, 홍천군 6곳뿐이다.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지낸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는 “춘천은 웰다잉 문화조성을 위한 법제적 담론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지자체 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수시대, 죽음을 준비하다··· ‘죽음준비교육’ 필요

     

    이지원 생사학 아카데미 대표가 북부노인복지관에서 ‘사별 경험 어르신 정서 지원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생사학 아카데미)
    이지원 생사학 아카데미 대표가 북부노인복지관에서 ‘사별 경험 어르신 정서 지원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생사학 아카데미)

    전문가들은 자연스러운 웰다잉 문화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공교육 학령기부터 전 세대에 걸쳐 ‘죽음준비교육’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죽음준비교육의 목표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두려움을 단계적으로 개선하고 생명 존중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국내외에서는 이미 죽음준비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지난 7월 지자체 중 처음으로 죽음준비교육에 대한 조례인 ‘죽음교육 진흥 조례’를 만들었다. 제주도청 특별자치행정국 평생교육과 문현식 주무관은 “학령기 도민부터 전 연령에 걸쳐 죽음의 본질을 교육하고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조례를 제정하게 됐다”며 “현재 일부 예산이 확보된 상태이며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제주도의회 송창권 도의원은 지난 10월 학생들에게 죽음의 본질과 인간의 존엄을 가르치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죽음에 대한 교육 지원 조례안’을 발의한 상태다.

    미국, 독일, 일본에서는 이미 죽음준비교육을 정착시켰다. 미국에서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서 펼쳐진 시민운동의 영향으로 1960년대부터 죽음준비교육이 시작됐다. 유치원 때부터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뿐 아니라 평생교육 차원으로 전 성애에 걸쳐 죽음에 대한 이해와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독일은 1984년 문화와 죽음을 접목한 토론을 계기로 죽음준비교육을 발전시켰다. 현재는 초·중·고등학교 종교수업에서 선택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일본은 학교폭력, 왕따, 자살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삶의 소중함, 생명 존중을 교육하고 사회적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죽음준비교육을 채택했다.

    이지원(67) 생사학 아카데미 대표는 “죽음이라는 말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며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고 생명 존중과 삶의 소중함을 배우는 ‘죽음준비교육’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춘천, 웰다잉 선진 도시로 나아가려면

     

    오진탁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 (사진=조아서 기자)
    오진탁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 (사진=조아서 기자)

    비단 춘천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생사학 전문가, 인프라 등은 크게 부족하다. 오진탁 교수는 “중앙정부나 지자체 모두 웰다잉을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춘천이 죽음의 질을 향상하려면 정책적인 뒷받침이 선행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오 교수는 “춘천시가 죽음준비교육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확보된 예산으로 지원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학교 교육의 경우, 춘천시교육청에서 관련 조례를 제정하는 등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 교수는 “한림대에서 1997년부터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나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전혀 죽음준비교육을 준비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한림대는 1997년 철학과에서 ‘죽음준비교육’ 과목을 개설한 이후 생사학을 꾸준히 가르치고 있으며 2004년 생사학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오 교수는 ‘지혜의 숲’과 같은 지역 사회의 기관과 연계한 전문인력 양성을 제안했다. 춘천시는 올해 1월 사회교육 차원에서 지혜의 숲을 설립해 50대 이후 신중년과 노인층의 사회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기관과의 연계 사업으로 웰다잉 전문과정을 운영해 지속 가능한 전문가 양성 체계를 갖출 수 있다”며 “연수 교육을 통해 공무원, 교사, 군인, 소방관, 의사, 간호사, 경찰, 사회복지사, 상담원 등이 웰다잉 도우미로 활동하도록 돕는 것도 방안”이라고 말했다.

    [조아서 기자 chocchoc@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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