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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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아시나요?

    올해 11월 3일, 92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적 확산
    춘천고, 소양고 등 춘천 학생들도 적극 동참

    • 입력 2021.11.03 00:01
    • 수정 2021.11.04 07:24
    • 기자명 남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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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올해 92주년인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3·1운동, 6·10만세 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 국가기념일이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올해 92주년을 맞았다. (그래픽=남주현 기자)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올해 92주년을 맞았다. (그래픽=남주현 기자)

    학생 독립운동의 시작은 전라도(전남) 나주역에서 일본 남학생들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데서 발단됐다.

    지난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박기옥, 이광춘, 이금자 등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를 목격한 박준채(박기옥의 사촌 동생)는 일본인 학생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슈조(福田修三)는 사과는커녕 “뭐야 조센징 주제에”라며 비아냥거렸다. 격분한 박준채가 후쿠다 쇼조의 뺨을 때렸고 결국 열차 안에서 한·일 학생 간 집단 충돌로 번졌다. 열차에 타고 있던 일본인들은 모든 잘못을 한국인 학생들에게만 몰아붙였다. 한인 학생들은 분노를 삼키며 열차를 떠나야 했다.

    이 일은 곧 나주와 광주를 통학하는 학생들을 통해 광주 전역에 알려졌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어 1929년 11월 3일, 일요일임에도 일왕의 생일(명치절) 기념식을 위해 등교 후 귀가하던 광주고등보통학교 조선학생과 일본 학생 간 충돌이 발생했다.

    이에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 광주 학생들은 식민지 강압 정책 반대 시위를 결심했다. 학생시위는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의 학생까지 합류하며 광주 전체로 들불처럼 번졌다.

    일제는 이 시위 이후 휴교령을 내리고 주모자를 검거했다.

    하지만 광주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비밀결사조직 ‘독서회’를 조직해 광주지역 청년단체들과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인 12일 다시 한번 시위를 펼쳤다. 이어 이들은 1차 시위로 구속된 학우들이 있는 광주 형무소로 향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재연한 조형물 사진 (사진=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재연한 조형물 사진 (사진=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제공)

    광주 학생들의 저항 소식이 알려지며 전국 곳곳의 학생들도 시위나 동맹휴학 등으로 뜻을 함께했다.

    전국 320개 이상 학교, 5만 4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는 당시 학생의 절반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이 학생 독립운동으로 1462명이 구속되고, 2912명이 퇴학당하거나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춘천의 학생들도 학생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춘천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등학교) 학생들은 1926년 4월 26일 순종 서거 이후 교내에서 일본인 교사들의 민족 모욕과 폭언이 발생하자 전교생이 일제히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 10월에는 일본인 교사 배척을 이유로 항일운동을 벌였다. 이어 3년 뒤인 1929년 5월에는 2차 항일동맹휴업, 1935년 7월에는 3차 항일동맹휴업 운동도 벌였다.

    이후에도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한서 남궁억 선생과 농촌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상록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인근의 춘천농업학교(현 소양고등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 7일 3·1 만세운동에 동참하며 학생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27년 9월과 1932년 4월, 1937년 6월 등 3차례에 걸쳐 항일동맹휴업운동에도 동참했다.

    춘천농업학교의 본격적인 항일운동은 1937년 11월에 ‘독서회’를 조직하며 시작됐다. 독서회는 민족주의 책을 읽고 토론회와 독후감 발표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높였다. 하지만 3년 뒤인 1940년 12월 일제에 독서회의 정체가 발각되며 활동은 중단됐다.

    이런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국회는 1953년 10월 20일 제16차 임시국회에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이후 매년 정부가 ‘학생의 날’을 기념해 왔으나, 1973년 3월 30일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하는 목적으로 제정된 대통령령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폐지됐다.

    1984년 9월 22일 국가기념일로서 ‘학생의 날’이 부활 되었고, 2006년 2월 9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민병희 강원도 교육감은 도내 각급 일선 학교에 보낸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서신에서 “우리는 학생을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일제강점기 역사 곳곳에서 학생들은 미래를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 역사 현장에서 생생히 자기 목소리를 내온 현재의 시민이었다”며 “92번째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학생 시민이 당당한 시대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남주현 기자 nam01@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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