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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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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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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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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지       

                              뚜르게네프 (李永哲譯)

나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늙은 거지가 나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충혈 된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고, 파리한 입술, 갈갈이 찢어진 누더기,

진물이 흐르는 상처···, 아아, 얼마나 심한 가난이 이 불쌍한 사람을 괴롭히는가?

그는 진물이 흐르는 더러운 손을 내게 내밀었다. 그는 신음하면서 중얼중얼 동냥을 청하였다. 

나는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 보았다. 지갑도 없고, 시계도 없고, 손수건도 없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나온 게 없었다. 그런데 거지는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그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하고 당황해 하다가, 

나는 그의 더럽고 벌벌 떠는 손을 힘 있게 덥석 잡았다. “여보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마침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그려!”

거지는 충혈 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파리한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그도 나의 싸늘한 손을 잡았다. “아니요, 당신께서는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이것도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요, 참 고마운 선물입니다.”

*뚜르게네프(1818-1883): 작품「아들과 아버지」 「첫사랑」, 산문시「스핑크스」 「노파」등.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오늘 아침 나는 왜 문득  뚜르게네프의 산문시 ‘거지’를 생각했을까?

거지는 꼭 남에게로부터 빌어먹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다. 가진 것이 많아도 정신적인 궁핍, 그리하여 남의 것을 탐하고 노략질하는 사람들은 더욱 극악한 거지같은 인간이란 생각이다. 그것도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못 가진 자(者)들의 것을 빼앗고 속인다면 그것은 더 큰 죄악의 가면을 쓴 정신적 황폐에 이른 ‘거지’임에는 틀림없다.

겉과 속이 일치되는 사람, 예절이 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을 우리는 흔히 ‘신사’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예의 바르고 학덕(學德)과 신의를 갖춘 교양 있는 남성에 대한 존칭을 신사(gentleman)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신사’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보면서 이 시(詩) 감상의  말문을 열어 보았다.

뚜르게네프의 ‘산문시’는 “시의 옷을 입힌 철학”이라고 한다. 그만큼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내면에 깔려 있다는 뜻일 게다. 그는 일찍이 산문시를 발표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독자가 이 산문시를 단숨에 죽 내리 읽어 버리지 말고 한 편씩 음미해 가면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고요한 명상으로 쓰여 진 그의 산문시는 인생관, 세계관, 곧 그의 철학과 사상이 담겨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많은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위의 시에서 두 주인공은 마치 동체가 된 듯 친밀감으로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지는 신사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뚜르게네프가 상상력으로 승화시킨 작품인지? 아니면 사실성을 바탕으로 리얼리티를 살려낸 작품인지 모르지만 인간미와 인간애가 물씬 풍긴다. 

이 시의 절정은 “나는 그의 더럽고 벌벌 떠는 손을 힘 있게 덥석 잡았다. 여보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신사는 말한다. 격의 없이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신사의 인간미가 부각된다. 거지 또한 신사와 진배없다. 자신의 더러운 손을 덥석 잡아준 신사에게 “아니요, 당신께서는 ··· 이것도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요! 참 고마운 선물(적선)입니다”라고 한다. 이렇게 이 시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거지’와 ‘신사’를 격의 없는 동등한 인격체로 승화시킨 발상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그 사상이야말로 뚜르게네프를 더욱 인간적인 작가로 인식케 한다. 

지난해 2월부터 2년이 가깝도록 우리는 ‘코로나’라는 재앙을 겪고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 시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도 속임수 없이 진실한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양심의 도(道)를 지키는 사회, 그런 신사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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