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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풍경] 빈 밤송이를 들춰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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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풍경] 빈 밤송이를 들춰보는 마음
  •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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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0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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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자동차가 없는 저는 매일 아침 전철을 타고 유정역으로 가서 거기에서 김유정문학촌까지 걸어서 출근합니다. 역에서 문학촌까지 5분 정도 거리인데 그 길이 참 재미있습니다. 김유정역에서 곧바로 큰길 쪽으로 나가면 ‘동백꽃 식당’도 있고, ‘김유정 닭갈비’도 있고, ‘김유정 부동산소개소’가 있습니다. 건널목을 건너면 ‘농협 김유정지점’이 있고, ‘김유정 우체국’이 있습니다.

저는 역에서 나와 큰길보다 뒷길로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뒷길로 걸으면 예전 아주 작은 모습의 김유정역이 나오고 기차가 다니지 않는 구 철길이 나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철마다 꽃이 핍니다. 요즘은 늦가을 코스모스가 철길 옆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매일 아침 제가 꼭 들러서 이리저리 살펴보는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김유정역 뒷길 밤나무 아래입니다.

지금은 밤을 다 따고, 또 다 떨어져서 밤알이 거기에 있을 리가 없지요. 지난해 가을에도 제가 첫 밤을 주운 곳이 김유정역 철길 옆 밤나무 아래에서였습니다. 올해에도 그랬지요. 여름에 푸르던 밤송이가 가을이 되면서 매일매일 조금씩 커지고, 붉은빛을 연하게 내면서 밤송이가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 그것을 밤새 부엉이가 밤나무에 와서 방귀를 뀌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우리뿐 아닙니다. 어른들도 어느 산 밤나무의 밤송이가 벌어졌더냐? 하고 묻는 말을 강릉 사투리 그대로 “그 산에 부엥이가 방구 킸더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린 저희도 “안죽 안 켔어요.” 혹은 “켔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밤송이가 벌어지는 게 부엉이가 밤나무에 와서 밤송이에 대고 방귀를 뀌어서 그렇다고 여겼던 거지요.

학교에 모여드는 이 마을 저 마을 아이들도 저마다 자기 동네 밤나무에 부엉이가 방귀를 뀌었는지 안 뀌었는지 경쟁했습니다. 일찍 떨어지는 밤도 그보다 늦게 떨어지는 밤도 며칠 후면 다 똑같지만 그래도 어느 동네 아이가 햇밤을 제일 먼저 학교에 가져오는지 내기했던 것이지요. 밤알이 붉게 물들어가는 걸 ‘아레기’가 들었다거나 ‘얼레’가 들었다고도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엔 추석 차례상에 올릴 과일을 어른들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따서 준비합니다. 요즘은 9월 초에 이미 노랗게 익은 단감이 시장에 나오지만, 마당 안팎에 있는 여러 그루의 나무들 가운데 어느 나무도 추석 전에 노랗게 익는 감이 없습니다. 그래도 차례상엔 감을 써야 하니 아직 덜 익은 것 중에서 그래도 제일 굵고 노릇노릇해지는 감을 따서 뜨거운 소금물에 침을 들여 단감처럼 달게 만듭니다. 

밤 역시 예전에 할아버지가 심은 밤나무 산의 그 많고 많은 나무 가운데 어느 비탈의 어느 나무가 가장 알이 굵고 빨리 익는지 우리가 먼저 알고 따옵니다. 장대와 삼태기를 들고 밤을 따오는 길에 여름에 소를 먹이러 다니며 보아두었던 다래도 따오고 머루도 따옵니다. 아직 따 올 만큼 익지 않았으면 다음에 와서 따야지 하면서도 동네 다른 아이가 먼저 따 갈까봐 괜히 조바심을 냅니다.

이번 가을에도 김유정역 뒷길을 걸어 문학촌으로 출근하면서 어김없이 첫 밤을 그 길 밤나무 아래에서 주웠습니다. 어릴 때 다른 동네 아이들이 그해 가을의 첫 밤을 주워와서 자랑하듯 문학촌 직원들에게 내가 주운 밤을 자랑했습니다. 그게 추석 며칠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첫 밤을 주우며 추석 지나고 오면 밤이 많이 떨어지겠구나 생각했는데 제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던가 봅니다.

웬걸 추석 연휴 지난 다음 그 길로 첫 출근을 하는데 나무 아래 땅바닥에만 빈 밤송이가 수북하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추석 때 고향에 가서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는데, 추석 연휴 기간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밤나무 밑으로 와서 나무 팔매질을 했겠는지요. 남이 밤을 주워가고 남은 빈 밤송이를, 그것도 손바닥만큼이나 큰 밤송이를 이리저리 들춰보는 마음이 얼마나 허전한지 한번쯤 경험해본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가을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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