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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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춘 시인의 문예정원] 성찰

    • 입력 2021.09.29 00:01
    • 수정 2021.09.29 12:11
    • 기자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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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찰

                 권 혁 웅

    1
    『성찰』을 잃어버렸다 나남출판사 간(刊) 두 권짜리 완역본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 노란 펜으로 밑줄을 치며 읽던 책이었다 여백에 달아둔 주석도 코기토도 신의 존재도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2
    물리학자들이 먼저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완전한 구형의 신이 완전한 진공 위에 떴다고 해보자……
    공학자들이 이 조건을 구현하지 못하자 
    다음에는 수학자들이 나섰다
    μ1이 이름이라면 (α∈μ1) → (α=<μ2, π>)인데, 여기서 μ1는 이름이고 π는 조건이다……*
    순환논증에 빠졌으므로
    이번에는 철학자들이 나섰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어떤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는 다시 원인이 있으며…… 종국에는 원인을 갖지 않는 원인이 있다……

    레밍들이 강물에 뛰어들다가 웃었다 
    익사했는지 소사(笑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시인들이 나섰다
    보도블록 틈새로 올라오는 새싹이여, 신의 숨결이여……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그 위로 곱게 내려앉았다

     

    3
    하와이에서 돌아오니 내 몸이 하루 더 늙어 있었다 19시간 동안 신은 시차에 적응하느라 이코노믹 석에서 몸을 뒤척였다 

     

    4
    요즘 광화문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이나 수문장
    교대식과 파수의식을 연다 왕도 없고 왕의 눈도 없으나 왕의 눈이 보는 장면은 있다 궁궐 안에서는 신의 아이들이 참가한 사생대회가 한창이다
    보라고, 새싹은 저렇게 난다고
    나중에 저 순서대로 싹을 틔워야 한다고

     

    5
    성찰을 잃어버린 후에 나도
    데카르트 비판자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근대가 시작되었다
                       
      
    * 바디우,  『존재와 사건』 에서 인용.
    **권혁웅:1997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으로 『마징가 계보학』,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외 다수. 현재 한양여대문창과 교수

    이영춘 시인
    이영춘 시인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카르트의 『성찰』과 『방법서설』은 그의 심장과 뼈와 같은 사상 체계의 정수로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분명하고 확실한 것만을 진리로 삼겠다”라는 것이 그의 철학적 명제이다. “내가 단지 생각하는 것만 중단한다면,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게 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방법서설」)라는 명제를 인류사에 기록했다. 

    이 시의 작자 권혁웅 시인은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다가 버스에 두고 내렸다. 그 읽던 책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정서’를 이 시의 화두로 하고 있다. 

    책을 잃어버렸지만, 머릿속에 여운 혹은 기억으로 남아 싸고도는 데카르트의 ‘말’에 즉 『성찰』에 동화되어 “노란 펜으로 밑줄을 치며 읽던” 『성찰』을 ‘성찰’함으로써 존재를 인식하고 존재 탐구에 천착한다. “여백에 달아둔 주석도 코기토도 신의 존재도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라고 고백하면서 작자는 그의 머릿속에 밑줄 친 사유를 꺼내어 이 시를 쓴 것으로 인식된다.

    연 구분과도 같은(그러나 연 구분이 아님) 1·2·3·4·5 중에서 특히 2에서 시인의 머릿속을 점유하고 있는 ‘성찰’의 구성 주체들이 등장한다. 즉 물리학자들, 공학자들, 수학자들, 철학자들, 그리고 레밍들, 시인들이 그것이다. 이 등장인물에서 특히 필자의 눈을 끈 것은 ‘레밍들’과 ‘수학자들’이다. “레밍들이 강물에 뛰어들다가 웃었다”라는 표현은 해학적인 듯하지만 인간들에 대한 기막힌 풍자이자 패러독스이다. 두 번째로 ‘수학자들’에서 필자의 눈이 머문 것은 시와 수학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집합론의 창시자인 칸토르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자유는 곧 시적 상상력과 수학의 엄격함, 여성의 부드러움이 서로 껴안는 하나의 세계로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 ’성찰‘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사유의 시다. 이 시의 구성 요체들을 중심으로 작자의 사유의 세계를 따라가며 감상한다.

    “먼저 신의 존재를 증명한 물리학자들”과 “완전한 구형의 신이 완전한 진공 위에 떴다고 가정해 보는··· 공학자들이 이 조건을 구현하지 못하자” “다음에는 수학자들이 나섰다” 그리고 작자가 주석에 달아놓은 기호학으로 연결되는 바디우 『존재의 사건』은 “순환논증에 빠졌으므로 이번에는 철학자들이 나섰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어떤 현상에든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는 다시 원인이 있으며··· 종국에는 원인을 갖지 않는 원인이 있다” 즉 원인이 없는 원인이 있다고 성찰한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레밍들이 강물에 뛰어들다가 웃었다”로 역설(逆說)한다. 여기서 레밍들은 과연 무엇일까? 암시하는 바가 크다. 위에 언급한 대로 해학적인 듯하지만 인간들의 다면적 속성에 대한 기막힌 풍자이자 패러독스다. 그리고 마지막 보루인 양 시인들의 숨결이 “신의 숨결”로 등장한다.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보도블록 틈새로 올라오는 새싹이여, 신의 숨결이여···” 그러나 잔인하게도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그 위로 곱게 내려 않았다”라고 숨통을 조인다. 이런 현상은 과연 무엇에 대한 ‘성찰’이겠는가? 답은 이 시를 읽는 이들의 마음속에 있다.

    3에서 “하와이에서 돌아오니 내 몸이 하루 더 늙어 있었다. 19시간 동안 신은 시차에 적응하느라”에서 인간은 곧 신이라는 동일시 기법의 등식으로 존재가치를 높인다.

    4에서는 이미지를 확대하여 인간의 의식을 분산시킨다. 그러나 이 4에는 꿈틀거리는 생명 의식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데몬스트레이션을 일으키는 군중이 연상되고 또 한쪽 “궁궐 안에서는 신의 아이들이 참가한 사생대회가 한창이다” 이 평화로움과 혼돈의 대비가 인간을 존재케 하는 이유로 부각된다. 이런 카오스 속에서 “보라고, 새싹은 저렇게 난다고/나중에 저 순서대로 싹을 틔워야 한다고” 역설적 발화 속에서 희망적 이미지와 메시지가 승화되고 암시된다. 

    5에서 “성찰을 잃어버린 후에 나도/데카르트 비판자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한다. 좀 더 적극적 자세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존재의 대열에서 살겠다는 다짐으로 읽힌다. 그것이 곧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 이유이자, 생각하는 존재라는 순환적 진리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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