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값어치 이야기
  •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하창수의 딴생각] 값어치 이야기

    • 입력 2021.09.12 00:00
    • 수정 2021.09.12 20:32
    • 기자명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상품의 가치를 화폐 단위로 나타낸 것이 ‘가격’이다. 가격은 상품을 구입하려는 욕구인 ‘수요’와 상품이 시장에 제공되는 ‘공급’이 접점을 이루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가격과 수요·공급의 함수는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에 해당하지만 굳이 경제학을 배우지 않아도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하는 무수한 상품들의 가격은 상식을 가볍게 배반한다. 가령, 상품이 인기가 있어 구입하려는 욕구가 높아질 경우 거기에 맞춰 공급이 늘어나게 되면 가격에 변동이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쉽게 이득을 챙기는 데 꽂힌 생산자라면 오히려 공급을 줄여 가격을 높이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가격이 높아져서 구입을 포기하는 소비자가 속출하기 전까지 생산자는 동일한 단가를 투입해 더 많은 이득을 챙기는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 생산자가 하나둘 정도면 독점에 의해, 여럿이면 과도한 경쟁 혹은 담합에 의해 어그러지는 것이 또한 가격이다. 이것이 경제학의 실재 법칙이다.
      
    가격의 우리말은 ‘값’이다. 원래 모양은 시옷(ㅅ)이 덧붙여지기 전의 ‘갑’이었다. “일정한 값에 해당하는 분량이나 가치”를 뜻하는 ‘값어치’란 말의 옛 철자가 ‘갑어치’였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어원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갇 → 갈 → 갋 → 갑 → 값’으로 변화되었다고 본다. ‘갇’이나 ‘갈’은 칼[刀]의 고어인 ‘갈’과 관련이 있고, 칼을 만드는 데 사용된 구리[銅]의 고어인 ‘갈/굴’과 뿌리가 같다고 추론된다. 작고하신 어원학자 서정범 선생은 우리말과 같은 계열의 언어에 속하는 터키어에서 근거를 찾았었다. 터키어로 바위를 뜻하는 ‘kaya’가 ‘kara’에서 변한 말이고, 이 말의 어근은 ‘kar’인데, 바위가 값어치 높은 광물을 함유하고 있는 물질이라는 데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다.

    영어로 값 혹은 가격은 보통 price를 많이 쓰지만 cost도 흔히 쓰인다. price의 경우 어원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프랑스어 prix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최우수상을 가리키는 그랑프리(Grand Prix)의 그 prix인데, 정확한 어원은 prix의 고대형인 pris이다. 다른 한 설은 라틴어 pretium에 기원을 둔다. 흥미롭게도 라틴어 pretium에는 ‘벌’ 혹은 ‘응보’라는 뜻이 들어 있다. cost의 어원을 따지는 경우도 프랑스어 coût와 라틴어 constāre로 갈라진다. 어원과도 상관관계가 있지만, price와 cost가 가지는 ‘값’의 차이는 현저히 다르다. 전자는 ‘가치’에, 후자는 ‘손실’에 무게중심을 둔다.

    우리의 삶을 ‘값’으로 치환한다면 어떤 값이 매겨질까. 어떤 삶을 우리는 ‘값지다’고 말할 수 있고, 어떤 삶을 ‘헐값’에 비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삶을 얻기 위해 어떤 ‘값’을 지불했을까. 지불하기는 했을까. 물이나 공기처럼 귀하디 귀하지만 공짜처럼 얻어 쓰듯 그렇게 삶을 써대는 건 아닐까. 공짜처럼 얻어 쓴다고 ‘귀한 값’이 ‘헐값’이 되는 건 아니다. 물이나 공기가 사라지면 삶이 사라진다는 이치는 “진정으로 귀한 것은 값이 매겨져 있지 않다”는 성자의 언설과 통한다. 이런 이치와 논리에 닿는 것은 의외로 많다. 사랑이 그렇고, 우정이 그렇고, 배려가 그렇고, 신뢰가 그렇고, 양보가 그렇다. 이런 관념은 상품이 될 수가 없으며, 상품이 될 수 없으니 값이 매겨질 수 없다. 값이 매겨지지 않으니 공짜처럼 쓰인다. 사랑을 잃고, 우정을 잃고, 배려를 잃고, 신뢰를 잃고, 양보를 잃어봐야 그것이 지닌 값이 얼마나 높았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자 상식인 가격과 수요·공급의 함수가 너무도 쉽게 우리를 배반하듯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관념들의 ‘값’이라는 인식 또한 우리 안에 그다지 공고하게 머물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과 배려와 신뢰와 양보의 무한한 ‘값’은 정치적 실리에, 눈 먼 욕망에, 하찮은 의심에, 치졸한 언변에, 가짜 뉴스에, 대책 없는 허영에, 처절한 복수심에, 넋 빠진 질투에, 무너지고 곤두박질친다. 이것이 인생의 진짜 법칙이다. 그래서 어느 속 깊은 작가가 그랬나 보다. “그대의 주머니가 아무리 두둑하더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값이 매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기사를 읽고 드는 감정은? 이 기사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