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빨래 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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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수첩] 빨래 원정대

    • 입력 2021.07.13 00:01
    • 수정 2021.07.15 00:05
    • 기자명 배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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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1년 개봉해 큰 흥행을 거둔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 중 첫 번째 편의 부제는 ‘반지 원정대’다. 호빗 ‘프로도’와 엘프 ‘레골라스’, 마법사 ‘간달프’ 등으로 구성된 반지 원정대는 악의 군주 ‘사우론’의 ‘절대반지’를 파괴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여정을 떠난다.

    정확하게 20년이 지난 2021년, 춘천에서 빨래 원정대가 발족했다. 셔츠 5벌과 바지 2벌로 일주일을 버티는 직장인에게 주말 빨래는 필수다. 시기를 놓치면 당장 다음 주에 입고갈 옷이 없다. 단수에 이어 녹물이 나오는 상황을 극복하고, 월요일 출근 사수를 위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춘천 대부분 지역에 단수가 시작된 지난 9일. 이때만 해도 빨래 원정을 떠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소양취수장 취재 중에 만난 담당 공무원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손된 밸브는 금방 고친다. 늦어도 오후 11시에는 복구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물은 이틀이 더 지나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누런색 녹물이었다. 빨래를 돌리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이런저런 방법을 고심하다가 문득 ‘빨래할 때 세제를 넣으니 녹물도 깨끗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곧 포기했다. 인터넷에서 세탁기에 녹물이 들어가면 세탁기 내부의 통을 다 들어내야 한다는 글을 봤기 때문이다.

    손빨래도 상상했다. 역시나 그만두기로 했다. 마트에서 사 온 2리터(ℓ) 생수 6병으로 밀린 빨래를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실한 하체로 화장실에 장시간 쪼그려 앉을 자신도 없었다. 고민만 반복하다가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빨래방...?”

    무릎을 '탁' 쳤다. 그런데 춘천의 빨래방은 모두 녹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집에서 녹물을 대면하고 나니 의심이 많아졌다. 서면과 신사우동, 신북읍 일부 지역은 용산취수장에서 수돗물을 공급해 영향 밖이었지만, 일말의 의구심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어들고 집 주변 빨래방을 검색했다. 가평 1곳, 홍천 3곳이 나왔다. 가평이 더 가깝지만, 문을 닫았을 경우를 고려해 홍천으로 차를 몰았다. 30분을 달려 찾아간 빨래방은 이미 만석이었다. ‘빨래 원정대가 또 있나?’ 싶었다.

    자리가 나자 얼른 만원짜리 지폐를 500원짜리 동전으로 바꿨다. 이 중 8개를 넣으니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30분 후 완성된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다시 30분을 기다렸다. 일상에 찌들었던 옷들이 뽀송뽀송해졌다. 산뜻한 옷을 트렁크에 싣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개운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단수 사태가 벌어진 지 나흘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는 단수가 계속되고, 녹물이 나오고 있어서다. 빨래 원정대뿐만 아니라 목욕 원정대, 설거지 원정대 등 다양한 원정대가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춘천지역 학교 6곳에서는 급식 차질이 빚어지기도 했다. 물의 도시라는 춘천의 슬로건을 무색하게 하는 상황이다. 춘천시의 늦장 대응도 아쉬움을 남긴다. 단수가 시작되고 25분이 지나서야 공지했고, 자영업자들은 큰 피해를 봤다. 이번 사태가 일어나게 된 원인도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다.

    영화 속 반지 원정대는 절대반지를 파괴하고 평화를 되찾는다. 빨래 원정대도 빨래를 완료했으니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직 진정한 평화는 찾아오지 않고 있다. 언제 또 원정을 떠나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춘천시의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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