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혼자 먹는 점심, 그 쓸쓸함과 오붓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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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의 뒤적뒤적] 혼자 먹는 점심, 그 쓸쓸함과 오붓함

    • 입력 2021.06.28 00:00
    • 수정 2021.06.30 06:09
    • 기자명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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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맛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한 편의 소설이 이런 감성을 자아낼 수 있을까요? 여기 그런 소설을 만났습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일본 작가 하라다 히카의 『낮술』(문학동네)이 바로 그런 소설입니다.

    처음엔 ‘낮술’(원제는 ‘점심 술’)이란 제목이 의아했습니다. 우리네도 점심 때 반주를 곁들이는 이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이걸로 무슨 이야기를 빚었을까 싶었죠. 주인공이 서른한 살,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그랬습니다. 한데 읽어 갈수록 빨려들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에 읽어 치울 정도로요.

    주인공 이누모리 쇼코는 아이가 생겨 훌쩍 결혼을 했다가 시어머니와의 불화, 남편의 외도가 겹치면서 초등학생 딸을 두고 이혼한 여성입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구했는데 이게 묘합니다.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곁을 지켜주는 ‘지킴이’거든요. 간병인과는 다른 것이 그저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정도의 일을 하거든요. 따라서 치매가 온 반려견, 밤에 일 나가는 엄마를 둔 아픈 아이, 상처한 후 자살을 시도하는 노인, 대인관계가 서툰 인기 만화가, 아이돌에 빠진 중년의 증권사 간부의 대화 상대가 되거나 돌보미 노릇을 합니다.

    소설은 이들과의 인연과, 주인공 쇼코가 아침에 퇴근하면서 하루 한 번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위해 들르는 식당들이 어우러지는 16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연작소설이라 하겠는데 실재하는 식당, 음식이 소재라는 점에서 일단 흥미롭습니다. 그러면서도 쇼코가 만나는 사람들을 좇다 보면 대도시에 산다는 쓸쓸함이 스며듭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노부인 모토코와의 만남을 다룬 ‘생선구이 정식, 나카노’입니다. 쇼코는 잡지 편집장인 아들의 부탁으로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것으로 알려진 모토코의 말상대를 하러 가는데 이 노부인 의외로 멀쩡합니다. 아들이 축하선물로 받아온 난초들을 자기 방에서 몰래 키울 정도로요. 그 모토코 부인이 그럽니다.

    “보통 풀꽃들은 크고 좋은 화분에 옮겨 심어 비료를 듬뿍 주면 순순히 잘 크는 법인데 난은 달라. 너무 큰 화분에 심으면 그 즉시 뿌리가 썩질 않나…비료도 필요 없어. 양분이라곤 전혀 없는 물이끼가 좋다니. 인간이란 존재도 그런 걸지 몰라.”

    이런 말도 하죠. “한 번 노인이 되면 계속 똑같은 줄 알았는데 노인에도 단계가 있더라고. 젊은 노인, 약간 젊은 노인, 아주 조금 노인, 완전한 노인, 상당한 노인, 심각한 노인, 어찌할 방도가 없는 노인.”

    쇼코는 재혼하겠다는 전 남편의 통보를 받고는, 새엄마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딸에게 직접 해주기 위해 프랑스 식당을 예약합니다. 세 식구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어렵게 말을 꺼내는데 이때 “처빌이라는 프랑스 허브의 뿌리를 무스 형태로 만든 디저트” “게가 올라간 블랑망제(우유에 생크림이나 젤라틴 등을 섞어 냉각시킨 젤리 형태의 과자)” 등이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어째 쓸쓸한데 처음 듣는 맛난 음식이 나오니 어째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이것이 이 소설을 ‘즐기는’ 또 다른 포인트입니다. 이국적인 음식이 여럿 등장하는데 요즘 유행하는, 거부감이 느껴지는 마구잡이 먹방과 달리 입맛이 당깁니다. 도대체 유자소금맛 오징어귀나 고구마와 대나무숯을 이용해 깔끔한 뒷맛을 자랑한다는 일본식 소주 ‘반쇼코’는 무슨 맛일지 궁금한 것이 저뿐일까요.

    “지나치게 부드러워 흐물거리는 장어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데 이곳의 장어는 식감이 알맞았다…이 타이밍에 아이즈호레를 한 모금. 기름진 장어와 쌀쌀한 술이 잘 어울린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혼자 돌봐야 하는 하루나를 대신해 밤을 새고는 수고료를 받지 않고 나온 쇼코가 “나 자신이 꽤 형편없는 인간이더라도 하루나 같은 이들에게 아직 손을 내밀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혼자 장어덮밥을 먹으면서 하는 생각입니다.

    소설은 치열한 갈등도,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는 어쩌면 심심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음식으로 맛을 내면서, 스케치하듯 그려낸 이야기는 가슴에 스며듭니다. 그러니 읽고나면 책 뒷표지에 실린 카피들에 공감하게 될 겁니다.

    “어른에게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다.”
    “고단한 당신이 ‘나 자신을 힘껏 안아주고 싶은’ 점심을 꼭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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