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피플] 염기원 6·25참전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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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피플] 염기원 6·25참전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

    • 입력 2021.06.25 00:00
    • 수정 2023.09.07 12:41
    • 기자명 배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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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깡통 수류탄이라고 있어. 탱크도 부술 수 있고, 사람들 있는 곳에 떨어지면 유리 조각, 쇳조각 파편이 사방 10m 정도는 퍼져. 맞으면 다…그게 터졌어. 몇 명이 죽었지 거기서. 볼 새도 없었어. 아직도 내 몸에 파편이 있어요.”

    올해로 대한민국 6·25 전쟁 발발 71주년을 맞았다. 당시 젊었던 참전용사들도 이제는 노병이 됐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은 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잊히지 않고 생생한 듯하다. 염기원(90) 6·25 참전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은 춘천에서 태어나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염 회장을 만나 전쟁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염 회장은 워낙 오래된 기억이니 만큼 시간이나 장소 등에 약간의 착오가 있을 수 있음에 양해를 구했다.

     

    6·25 참전 유공자회 염기원 춘천시지회장. (사진=배지인 기자)
    6·25 참전 유공자회 염기원 춘천시지회장. (사진=배지인 기자)

    ▶전쟁의 기억: 멀리서 들린 포 소리, 전쟁의 시작
    염 회장은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당시 석사동 구 여성회관 옆에 살며 야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른 아침 멀리서 포 소리가 들렸고, 집에 전화기가 있던 앞집 친구에게 전쟁이 일어난 것과 학생들은 춘천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왔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염 회장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신북면 발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제7연대 2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당시 5중대에 배속됐다는 것이 염 회장의 기억이다.

    이후 삽을 받고 개인 방공호를 파라는 첫 번째 임무를 시작으로 진지(진영)를 구축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하고 식사 추진을 다니기도 했다. 6월 26일 박격포의 거센 공격에 후퇴가 논의됐지만 대대장의 전선 사수 명령을 받고 전선을 지켰다. 다음날 북한군의 포 공격이 심해져 원창고개를 넘어 후퇴하며 홍천, 횡성, 원주, 청주에서 교전하며 대구까지 후퇴했다.

    이때의 춘천대첩은 6·25전쟁 발발 후 국군이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로, 아군은 300여명의 사상자가, 북한군은 7000여명의 사상자가 있었으며 북한군의 남하를 6일 동안 지연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후퇴 후 대구 칠성동의 방직공장에 임시주둔하던 당시 염 회장은 어릴 적 배운 정비기술로 차를 수리하거나 발전기를 돌리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염 회장은 어릴 때 홍역을 잘못 앓아 해수병이 있었는데, 밤낮으로 숨이 넘어갈 듯 기침했고 19~20세의 나이임에도 키는 158cm, 몸무게는 45kg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9월 28일 북한군이 점령했던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하며 춘천도 복구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춘천으로 올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춘천에 돌아와서 집에 가보니 우리 집의 반은 타버렸어. 가족들은 피난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참 허무했지. 우리 집에서 300m 떨어진 작은아버지네 갔더니 우리 할머니가 혼자 계신 거야. 그래서 죽은 사람들이 서로 만난 거처럼 부둥켜안고 울고 그랬다고.”

    ▶전쟁의 기억: 토벌, 습격, 후퇴와 상처
    춘천에서 염 회장은 친구를 만나 청년방위대에 들어갔다. 이들은 아군의 보급차를 습격해 보급품을 뺏는 패잔병(낙오된 북한군)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받았다. 청년방위대를 돕기 위해 대구에서 유격대가 합류했다. 염 회장은 “잘 사는 애들은 학생복을 입었고 유격대원들은 군인 헬멧을 썼어. 나는 바지저고리를 입고 형님이 학교 다닐 때 쓰던 학생모를 쓰고선 태극기를 그린 수건을 동여맸지. 11월이니까 엄청 추웠어”라고 회상했다.

    이들은 사북면 고탄리에 주둔하며 보초를 서다 동네 주민들의 제보를 받고 패잔병을 습격해 포로로 잡아 후방으로 보냈다. 이후에도 한 구멍가게 주인의 제보로 북한군 다섯 명 정도를 포위,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내고, 한참 교전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에는 북한군의 습격을 받았고, 후퇴하다가 북한군이 던진 깡통 수류탄에 전우들을 잃기도 했다. 이때 부상을 당해 병원에서 눈을 떴는데, 이내 병원도 습격당해 마석으로, 또 대구로 후퇴했다. 대구 사단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마산의 5교육대로 배치받았는데 전염병이 돌아 자고 일어나면 몇 명씩 죽어 나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후 거제도에 있던 제2하사관 교육대로 배치돼 총이나 자동차를 고치며 지냈다.

    그러나 약했던 몸 때문에 또다시 귀향하라는 명령을 받게 됐다. 걸어서 한 달 이상이 걸려 춘천에 오니 집에 돌아온 가족들, 친구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전쟁 그 후: 유공자 위해 헌신
    염 회장은 춘천에 돌아온 이후 미군에서 노무자로 일하며 영어를 배웠고 캠프페이지 부대가 생긴 후 기술자로 입사하기도 했다. 월남전 때는 베트남에서 기술자로 지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8년간 기술자 생활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생활할 때 한국신문에서 학교에 가고 싶어하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여학생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염 회장은 개인적으로 약 10년간 장학금을 지원했다.

    1993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염 회장은 동생,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고 아픈 아내를 간호했다. 대한노인회에서 약 4년간 봄내, 석사, 성원초등학교의 스쿨존 아동지킴이 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는 6·25 참전 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으로 선출돼 유공자 회원들의 권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국회의원, 강원도지사, 춘천시장 등을 직접 만나거나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회원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염 회장은 “임대아파트에 혼자 사는 유공자 회원들도 있는데 지자체 지원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더군다나 6·25 때 아이를 안고 업고 피난 가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 학비 대주려 고생한 미망인들도 보상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염 회장은 회원 중에 형편이 어렵거나 거동이 불편한 가구를 방문해 홍삼, 김, 마스크 등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정부에서 나오는 국가유공자 보훈수당은 월 34만원이며 춘천시에서 나오는 보훈수당은 월 10만원이다. 여기에 강원도에서 3만원을 더 지원한다. 지자체별로 보훈수당이 다른데, 춘천시는 지원금이 너무 적다는 것이 염 회장의 생각이다. 세월이 흐르며 유공자회도 회원들이 점점 줄었고 연회비를 걷어도 행사나 활동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염 회장은 “일년에 한 번 정도 회원들 다 모시고 점심을 먹는데, 버스 대절비용도 오르는데 사업비나 지원금은 오르지 않아 어려운 형편이다”고 말했다. 대선캠프에도 건의서를 보내 사무총장과 면담했다는 염 회장. 이러한 다양한 노력을 인정받아 올해 강원보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염 회장은 “유공자 회원들이 남은 삶을 서로 소통하고 잘 지낼 수 있게 돕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며 “나도 이제 90살이라 한계가 있지만 아직 이렇게 회원들을 위해 뛸 수 있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배지인 기자 bji0172@m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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