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의 딴생각] 합리적 의심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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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의 딴생각] 합리적 의심의 두 얼굴

    • 입력 2021.06.20 00:00
    • 수정 2021.06.21 00:10
    • 기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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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

    언론의 보도만이 아니라 실제 법정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합리적 의심’은 법률용어처럼 보이지만 실은 법률적 용어가 아니다. ‘합리적 의심’은 말 그대로 피의자의 피의 사실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인, 불확실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피의자가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파고드는 경찰·검찰의 수사나 조사에서 ‘가능성’이란 결국 ‘그러리라고 생각되는’ 무엇이고, 담당자들은 피의자가 해당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리적으로 의심되는’ 무엇의 완전한 증거를 찾아낼 때까지, 혹은 그런 상태가 완전히 불식될 때까지 수사나 조사를 벌여나간다. 수사나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긴급한 상황에서 피의자를 마주쳤을 때 영장을 발부받지 않고 수색하거나 체포할 수 있는 배경에도 역시 ‘합리적 의심’이 작용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은 ‘합리적 의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굴뚝에서 연기가 남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땐 적이 없다고 한다면 믿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는 것과 아궁이에 뭔가를 땠다는 것은 명확한 인과관계를 가진 동시적 사건이다. 마술을 부리는 것이 아닌 이상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는 아궁이에서 땔감이 타고 있음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게 한다.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본 수사담당자는 아궁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되고, 아궁이에서 타고 있는, 혹은 타고 남은 뭔가를 증거물로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굴뚝’과 ‘연기’가 빚어내는 명확한 인과관계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피의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피의자를 음해하기 위해 피의자가 한 것인 양 뭔가를 태워서 굴뚝에 연기가 솟도록 만들었을 가능성은 물론, 연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기가 아닌 것이 굴뚝에서 솟는 경우도 얼마든 일어날 수 있다. 이때 ‘합리적 의심’은 ‘비합리적인 의심’ 혹은 ‘합리적 착각’과 완전히 동일하다. 심각한 것은 한번 ‘합리적 의심’에 꽂히게 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의심’이 ‘합리적’이란 걸 확고히 하는 방향으로 모든 의식과 행위를 몰고 간다는 사실이다. 이때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매우 ‘합리적’인 ‘의심’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옳다”와 “내가 하는 의심은 합리적이다”는, 오직 자신에게만이 확고할지 모르는 ‘비합리적 사고’에 속절없이 매몰되는 것 - 이보다 더 끔찍한 ‘합리적 의심’은 없다.

    ‘합리적 의심’의 위험성은 ‘합리적’이라는 수식어에 그 위험성의 전부가 녹아 있다. ‘합리적’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영단어 rational은 ‘이성적(理性的)’이라는 뜻이고, 여기에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매우 냉혹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에서 ‘합리적’이라는 단어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면 ‘비합리적·비이성적·감성적·감정적’이라는 뉘앙스가 도드라진다. 특히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교감에서 생겨난 ‘합리적 의심’은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음험하고 무모한 ‘비이성적 억지’로 기능한다. 이런 오도가 가장 폭발적으로, 가장 함부로 쓰이는 곳이 정치판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정치판을 언론은 사냥터로 삼고, 그 언론에 ‘가짜뉴스’ 제공자들은 무분별한 소스를 공급하며 사적 욕망을 실현하며, 우리는 이들의 음험한 ‘비합리적’ 의심을 ‘합리적’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 헌법에는 형사피의자의 경우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본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명시돼 있다. ‘합리적 의심’은 이 ‘무죄추정의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유죄라는 의심과 무죄라는 추정의 충돌은 법질서의 교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경찰이나 검찰이 수사 중인 사건에서 피의자에게 매우 불리한 피의 사실들을 은근슬쩍 언론에 흘려 여론을 형성하고 수사에 유리하도록 만들고, 이러다 문제가 생기면 ‘국민의 알 권리’라는 칼을 빼든다. 이런 속 보이는 수작은 관행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빈번한 일이다. “아니면 말고”식으로 퍼트려지는 가짜뉴스는 가장 질이 나쁜 수작이다. 합리적 의심을 빙자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등에 업은 이런 식의 헌법 유린을 방조한다면 ‘헌법의 필요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불합리’한 의심 또한 매우 확연히 ‘합리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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