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뒤적뒤적] 누가 잡초를 쓸모없다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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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의 뒤적뒤적] 누가 잡초를 쓸모없다 했나

    • 입력 2021.06.14 00:00
    • 수정 2021.06.16 06:31
    • 기자명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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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잡초’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나요? 가수 나훈아의 노래 ‘잡초’ 노랫말 중 “이름 모를 잡초야…”에서 보듯, ‘이름 없음’인가요? 아니면 쓸모없음, 귀찮음? 질긴 생명력? 

    이건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장 ‘이름 없음’과 ‘이름 모름’은 다르죠. 내가 이름을 모를지언정 ‘잡초’라고 싸잡아 불리는 것 하나하나 모두 이름이 있으니까요. 뽑아도 뽑아도 싹을 틔우고, 한 줌 흙만 있으면 길바닥, 벽 틈 등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해서 ‘질긴 생명력’의 상징으로도 곧잘 등장하지만 실은 잡초는 생존력이 약해서 그런 ‘전략’을 취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잡초’에 관한 통념을 깨뜨리고, 잡초에게서 삶의 교훈을 찾아낸 책이 있습니다. 『전략가, 잡초』(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더숲)란 번역서입니다. 지은이는 일본의 식물학자이자 과학교양서 저자로, 식물학 차원에서 잡초의 세계를 소개하는 대신 잡초의 생존전략에 주목했는데 목차만 봐도 꽤 흥미롭습니다. ‘연약하기에 오히려 강하다’ ‘싹 틔울 적기를 기다리는 영리함’ ‘환경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킨다’ ‘살아남기 위해 플랜 B를 준비한다’ 등등. 

    먼저 ‘잡초다움’을 알아볼까요. 지은이에 따르면 잡초가 되기는 어렵답니다. 일본에는 종자식물이 약 7000종 있는데 이 중 잡초 취급을 받는 식물은 겨우 500종, 우리가 자주 보는 주요 잡초는 채 500종이 되지 않는답니다. ‘잡초’라 불리기도 만만찮은 일이죠.

    ‘잡초성weediness’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네요. 오트밀의 원료가 되는 귀리가 ‘본의’ 아니게 곡물이 된 잡초의 좋은 예입니다. 귀리는 원래 메귀리라는 보리밭의 잡초였는데 잡초답게 보리가 잘 자라지 않는 곳이나 기후에서도 왕성하게 자랐다죠. 그러니 누군가가 차라리 메귀리를 재배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메귀리는 재배식물로 개량되어 오트밀의 원료로 쓰이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잡초로 진화한 식물에서 작물이 된 것을 2차 작물이라고 하는데 호밀빵 원료인 호밀이나 잡초인 염주를 개량해 만들어진 율무가 바로 이에 속합니다. 잡초라 해서 늘 천덕꾸러기인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잡초가 연약한 식물이라는 뜻밖의 사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잡초라면 어디든 척박한 환경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걸로 알고 있으니 ‘연약한 식물’이라니 고개가 갸웃해질 일입니다. 지은이에 따르면 햇빛과 물, 땅만 있으면 식물이 살아간다 하지만 이건 오해랍니다. 식물들도 그 볕과 물,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는 땅속에서도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풍요로운 숲속은 식물이 자라기 적합하지만 전쟁터이기도 한데 잡초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식물이라네요. 그래서 치열한 싸움터를 벗어나 흙이 많지 않은 길가 등 강한 식물이 자라지 않는 곳만 골라서 자리 잡는 거랍니다.

    요컨대 잡초는 생명력이 강해서 척박한 곳에서‘도’ 자라는 게 아니라, 경쟁사회에서 도망친 낙오자이기에 그런 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입니다. 즉, 연약한 식물 잡초는 ‘싸우지 않는 것’을 전략으로 택했다는 거죠.

    대신 잡초는 주변 환경이 맞지 않으면 씨앗이 ‘휴면’ 상태에 들어가 싹 틔우기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도깨비가시풀이나 도꼬마리, 울산도깨비바늘처럼 한 열매에 발아 시기가 다른 씨앗을 함께 준비해 둘 중 하나가 살아남도록 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네요. 그런가 하면 토끼풀은 천적인 달팽이가 있는 남유럽에서는 청산이란 독물질을 만들어내지만, 달팽이가 없는 추운 북유럽에서는 청산을 만들어내지 않는 ‘환경 맞춤 전략’을 쓰기도 한답니다.

    이 책은 중고생을 위한 과학교양서로 쓰인 것인데 지은이의 집필 의도는 책 표지의 부제나 카피에 잘 담겼습니다. “‘타고난 약함’을 ‘전략적 강함’으로 승화시킨 잡초의 생존 투쟁기” 이건 부제목입니다. “잡초는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란 미국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의 말은 카피로 활용되었습니다. 제법 진지해 보이지만 설명이 쉽고 사례가 풍부해 과학책답지 않게 잘 읽힙니다. 혹시라도 전체를 읽는 것이 지루하고 부담스럽다면 마지막 장 ‘넘버 원이면서 온리 원인 잡초’만은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과학책에서 흔히 보기 힘든 깊은 울림과 반짝이는 지혜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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